[일요시사=경제1팀] 공무원을 하다가 퇴직하면 어디로 갈까? 조용히 집으로 가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인사들도 많다. '전관예우'다. 이런 현상은 고위직으로 갈수록 심해진다. 정부 고위직 관료들의 사퇴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들은 이들을 영입하기 위한 전쟁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은 '전관예우'의 나라다. 지난 2011년 안전행정부는 퇴직한 고위 공무원들의 전관예우 재취업 행태가 논란이 되자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공직자윤리법은 퇴직 공직자가 퇴직 전 5년 동안 소속한 부서와 밀접한 업무 연관성을 가진 일정규모 이상의 업체 등에 취업하는 것을 2년간 금지한다. 그러나 개정된 법 역시 퇴직 전 경력 세탁을 방지하지 못했고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실시하는 취업 제한대상 공무원의 재취업 심사 역시 감시 기능이 미약했다. 전보다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인사 태풍 예고
전문가들은 전관예우라는 관행이 뿌리 뽑히지 못하는 이유를 고위직 관료들과 대기업간의 '공생관계'로 들고 있다. 퇴직 관료들은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겨 보통 사람들의 연봉에 해당하는 월급을 받고 관료를 영입한 대기업들은 관련 공기업이나 정부부처에 조금 더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기업에 인기가 높은 정부부처는 국세청, 금감원, 국정원, 검찰 등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신년 벽두에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고위직 관료들의 퇴진이 잇따르자 대기업들은 이들을 영입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영입 대상은 많다. 골라잡을 수 있을 정도다. 이들이 언제 어느 곳으로 옮겨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연말연시 자의 혹은 타의로 관직을 내려놓고 대기업 스카우터의 물망에 오른 퇴직 관료들을 추려봤다.
국세청은 지난 12월27일 신임 중부지방국세청장과 부산지방국세청장 등 1급 승진 인사를 단행했다. 중부청장에는 이학영 본청 자산과세국장이, 부산청장에는 김연근 본청 국제조세관리관이 임명됐다.
하지만 인사여파로 인해 세무대 1기 출신으로 1급 승진 여부가 유력했던 김영기 조사국장이 12월26일 사표를 냈다. 행시 27회 중 유일하게 1급 승진을 하지 못한 제갈경배 대전지방국세청장도 같은 달 24일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지난해 4월에는 김덕중 청장의 취임을 계기로 국세청의 1급 고위직이 모두 사표를 제출한 일도 있었다. 조현관 전 서울청장과 박윤준 전 본청 차장, 김은호 전 부산청장이 대표적이다.
금감원에서는 동양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건섭 부원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금감원 부원장직은 금감원장의 제청을 받아 금융위원장이 임명하는 자리로 신제윤 금융위원장의 결정에 따라 사표 수리 여부가 결정되지만 이미 금감원 안팎에서 김 부원장의 사표 수리는 기정 사실화 되고 있다.
국정원, 국세청, 금감원…고위직 물갈이
전관예우 때문에…영입 공들이는 기업들
금감원도 4월 최수현 원장에게 재심임을 묻는 차원에서 주재성 전 금감원 부원장을 비롯한 임원 8명이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국정원의 경우 지난해 4월과 12월 두 달에 거쳐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1급 고위직을 모두 정리했다. 원장, 1·2·3차장, 기조실장 등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밀사항인 국정원 인사의 특성상 정확한 명단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4월 16개 시·도지부장들을 포함한 1급 90%가 옷을 벗었고 자리를 지켰던 1급들은 12월 국정원을 떠나면서 이명박정부 시절인 원세훈 전 원장에 의해 임명된 1급 고위간부는 현재 국정원에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에서는 지난해 12월 고위간부 인사를 앞두고 연수원 15·16기 고검장·지검장급 간부들이 줄줄이 사의를 표명했다. 15기 중에서는 길태기 전 서울고검장과 소병철 전 법무연수원장이 대검찰청에 사직서를 제출했으며 16기인 황윤성 전 서울 동부지검장, 이건리 전 대검 공판송무부장, 정병두 전 인천지검장도 사의를 표명했다.
지난 2일에는 총리실 1급 전원 사표 제출 소식이 전해졌다. 총리실은 "공무원 사회의 구태의연한 연공서열을 파괴하고 능력 위주의 인사를 발탁, 조직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차원"이라고 전원 사표 조치 이유를 밝혔다.
이번에 사직서는 낸 총리실 1급 관료들은 박종성 조세심판원장, 심오택 국정운영실장, 권태성 정부업무평가실장, 강은봉 규제조정실장, 류충렬 경제조정실장, 조경규 사회조정실장, 김효명 세종특별자치시지원단장, 김희락 정무실장, 이태용 민정실장, 신중돈 공보실장 등 10명에 달한다. 일부는 사표가 반려되고 현직 유임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지만 사표를 제출한 상당수가 교체될 것이라는 데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내각 개편은 없다"고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인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은 "부처별 1급 일괄사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유 장관은 "공직자가 자신이나 자기 부처, 장관을 위해 일하는 오래된 광행을 없애야 한다"며 "공직 이기주의를 버리고 철밥통을 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올해는 비정상의 정상화 차원에서 공무원은 물론, 공공기관과 함께 지방공기업 개혁에 나서겠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유 장관이 친박계 핵심인사인 만큼 고위 공무원단의 '물갈이'를 예고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재취업의 계절
또한 박근혜정부가 이명박 정부와 달리 출범 당시 1급 공무원의 일괄사표를 받지 않았던 점도 고위 공무원의 ‘인사 태풍’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말 기준 고위공무원단 1485명 가운데 1급은 288명이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