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야, 그게 뭐야? 이리 갖고 와봐.”
그건 새로 반장이 된 스라소니의 목소리였다.
“아, 아무것도 아녜요.”
“새꺄, 갖고 오라면 갖고 와!”
스라소니는 눈알을 부라렸다. 용운은 불안했지만 가져다 보여 줄 수밖에 없었다.
달라진 백곰
“새끼, 이런 걸 쓸데없이…….”
“제발 이리 주세요.”
“당장 갖다 버려!”
목상을 집어던지려던 스라소니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탁자에서 연필을 집어들었다. 그러고는 음흉스레 웃으며 목상의 앞부분에 유방을 그려넣는 것이었다.
콩알만하게 젖꼭지도 그리고 겨드랑이께엔 검은 칠까지 했다. 용운은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저도 모르게 입에서 욕설이 새어나왔다.
“개새끼!……”
스라소니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눈에서 불똥이 일고 있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러면서 그는 목상을 힘껏 내던졌다. 목상이 관자놀이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용운은 바짝 다가섰다. 스라소니는 잔뜩 인상을 썼다.
“이 쌍놈의 새끼, 보자보자 하니깐 간뗑이가 완전히 부었구만!”
그는 용운의 멱살을 잡아 쥐고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원래 잔인한 성격인데다 평소부터 곱지 않게 보아오던 터고 보면 제대로 걸린 셈이었다.
“이 새끼,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 봐!”
스라소니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언제 나타났는지 전혀 뜻밖에도 뒤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무겁게 흘러나왔다.
“야, 됐다. 그만 놔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곰이었다.
“뭐라구? 웬 참견이야!”
스라소니가 놀란 채 말했다.
“많이 맞고 산 놈이니까 그냥 좀 놔두란 말야.”
조용히 다시 한번 말했다. 체면을 손상당한 스라소니의 안면이 약간 씰룩거리는 듯했다.
불현듯 스라소니가 백곰의 턱을 향해 주먹을 휙 날렸다. 전광석화와 같았다. 백곰의 동작은 퍽 느려 보였다. 그런데도 어느 틈에 스라소니의 주먹을 피해 놓곤 히죽 웃고 있었다.
스라소니는 약이 바짝 올라 양주먹을 번갈아 휘둘렀으나 단 한 점의 타격도 가하지 못하자 씨근벌떡거리며 백곰의 소매를 나꿔채 잡곤 끌어당겨 면상을 향해 박치기를 날렸다.
하지만 그보다 1초쯤 빨리 백곰의 무릎이 그의 명치께를 쳐올리는 바람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빨을 으드득 간 스라소니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톱을 집어들고 접근하며 휘둘러댔다.
날카로운 톱날이 백곰 앞의 허공을 가를 때마다 용운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백곰이 발길질을 몇 번 했으나 닿지 않았고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구석쪽으로 몰렸다.
스라소니가 눈알을 희번득거리며 필사의 일격을 가하는 찰나였다.
용운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좁은 공간에서 백곰은 탁자 모서리를 딛고 올라 곧장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한 발로 스라소니의 이마를 정통으로 걷어찼다.
마을 누나 전신상
원생들 남은 낭만
뻗어 버린 스라소니는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신음을 뱉으며 일어났다.
“가봐.”
백곰이 말했다. 고참의 서열로 보나 전임 반장으로서의 관록으로 보나 아직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너 이 새끼. 오늘은 봐주겠어. 하지만, 나중에 어디 보자.”
스라소니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소리를 하곤 돌아갔다. 잠시 후였다.
“나도 그런 것 하나 만들어 줘.”
백곰이 용운에게 말했다.
“네? 반장님 어머니를요?”
“아니, 마을 누나 있잖아.”
“네? 그 누나를요?”
“그래. 이왕 만드는 김에 전신상을 만들어 주면 좋겠어. 가느다란 한쪽 다리도 보이도록 조각하고 말야.”
용운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백곰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상을 집어 용운의 손에 쥐어 주고는 묵묵히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새벽에 창문을 열자 바깥은 온통 눈 세상이었다.
아직도 눈송이가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다. 산과 들은 물론이고 삭막하던 수용소 건물과 그 주위의 추악한 모든 것들이 순백의 눈에 덮혀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런 감상도 잠깐, 곧 모든 원생들은 바깥으로 불려나가 눈 치우기 작업을 해야 했다.
관사에서 키우는 개와 강아지들이 오히려 원생들보다 더 자유를 누리며 눈 세상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개들은 이 좋은 날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느냐는 듯이 눈 치우는 원생들을 조롱하며 멍멍 짖어댔다.
그러나 수용소에 갇혀 인격을 반쯤 빼앗겨 버린 원생들이지만 결코 개들의 낭만에 지지 않았다. 어느 정도 제설작업을 마친 원생들은 각 사(舍)끼리 편을 지어 눈싸움을 시작했다.
때리는 놈도 좋아서 웃고 맞는 놈도 뭐가 좋은지 낄낄거렸다. 어떤 희한한 축제 같기도 했다.
희한한 축제
그런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원생들이 손을 합쳐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경쟁 심리가 발동하여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각 사에 소속된 원생들은 다른 팀보다 더 멋진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 저마다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대로 원장 이하 선생들의 심사에 따라 우등상, 장려상, 감투상 따위를 획득한 반원들은 그날 아침 특별히 푸짐한 밥이 주어졌다. 물론 국에도 건더기가 더 많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