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겨울 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청춘> 등을 연출하며 명성을 날린 곽지균 감독이 지난달 25일 대전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는 유서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곽지균 감독의 죽음이 알려지자 영화계는 1980년대 멜로 영화의 대명사가 일이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영화인의 삶과 애환을 재조명해 본다.
<사랑하니까, 괜찮아> 흥행 실패 후 4년 공백
“외롭다”는 말 자주 해…생활고에도 시달려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온 것으로 알려진 고 곽지균 감독은 발견 당시 타고 남은 연탄과 유서가 함께 발견됐다. 유서에는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고 곽지균 감독은 정통 멜로드라마 감독으로서 1986년 최인호 원작소설 <겨울 나그네>를 스크린에 옮겨 제25회 대종상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또한 <두 여자의 집>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상처>를 연출하면서 충무로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를 잡았다.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
이후 1990년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을 정보석·이혜숙 주연의 영화로 옮기면서 대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제29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김래원·배두나 주연의 <청춘>, 2006년에는 지현우·임정은의 <사랑하니까, 괜찮아>를 발표했지만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4년의 공백기를 갖게 된 것이 고인의 우울증을 키워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지인들의 추측이다.
곽지균 감독은 사망 직전까지 지독한 외로움과 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곽지균 감독의 측근 A씨는 “평소 외롭다는 말을 자주 했다. 좋아하는 영화도 만들 상황이 못 됐고, 가족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그의 생활고나 우울증을 돌봐줄 사람도 없었다”고 전했다.
A씨는 이어 “영화 <사랑하니까, 괜찮아> 흥행이 잘 안되기도 했지만 이 영화의 프로듀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2006년 이후에는 곽 감독과 연락을 거의 안 했다. 지난해까지 충무로 제작사를 찾아다니며 투자 문제 등을 부탁한다는 소식만 종종 듣곤 했다”고 덧붙였다.
곽지균 감독은 좋아하는 영화를 만들지 못해 괴로워했고, 쉰을 넘어서며 인간적인 외로움과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지난해에는 영화 일을 접고 대전의 아파트에서 혼자 칩거에 가까운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휴대 전화도 가지고 다니지 않아 연락을 주고받는 지인 숫자가 손에 꼽혔다. 대전에 내려간 뒤로 사람들을 더 만나지 못해 우울 증세도 심해졌다고 들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밝혔다.
영화 속의 화려한 주인공과는 달리 스태프의 현실은 암울하다.
한국영화는 영화인의 열정에 철저히 빚진 채 제작된다. 모두들 영화를 찍고 싶어 안달이다.
한 영화관계자는 “신인감독이고 중견 감독이고 모두 작품을 찍고 싶은데 돈 나올 구멍이 없다. 작품 하나를 말아먹으면 언제 또 영화를 찍게 될지 모른다. 감독들은 점점 위축된다”며 “그래도 입봉만 바라는 신인감독들이 허다해 푼돈에, 혹은 연출비 없이 감독을 선뜻 맡는다. 비지떡인줄 알면서도 덥석 무는 형태다”고 푸념했다.
스태프도 마찬가지다. 촬영에 들어가면 밤을 새는 일이 부지기수다. 노동시간도 대중이 없고 많을 때는 상상 이상이다. 더군다나 노동의 대가는 최저 생계비도 안 되는 쥐꼬리 수준이다. 이러한 시스템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말할 필요도 없다.
지난해 말에는 26세 밖에 안된 영화 조감독이 한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개봉을 앞둔 <방자전>의 스태프였다. 젊디젊은 이 청춘은 영화판에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스스로를 죽였을까.
한 연예계 관계자는 “아까운 영화인들이 하나 둘씩 열정을 탈취당한 채 스스로 사그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게 애석할 따름이다”고 전했다.
스태프 생활은 더욱 심각
젊은 영화인들은 “유명 배우가 출연한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조차 희망이 없다.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영화스태프들은 하루 13~ 15시간 이상의 노동에 야간촬영도 밥 먹듯 하지만 야근수당은 꿈도 못 꾼다. 영화스태프 B씨는 “저임금으로 생활이 불가능해 영화를 접고 웨딩촬영기사, 회사원으로 전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고개를 떨궜다.
특히 경기 불황으로 영화사들이 제작비를 줄이면서 스태프의 생활고는 더욱 심해졌다. B씨는 “지난해 3편을 찍었는데 올해는 1편 밖에 못했다”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B씨는 이어 “계약금의 절반을 촬영이 끝난 뒤 받는 경우도 있지만 촬영이 갑자기 중단되면 임금을 못 받는 이들도 많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