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일생일대 도전’ 차인표의 속내

벌거벗은 진짜 차인표를 보다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배우 차인표가 벗었다. 겉옷은 물론이며 속옷도 내던졌다. 완전한 알몸을 보여준다. 넷플릭스 신작 영화 <차인표>에서 차인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다. 그 기저에는 장벽처럼 쌓인 ‘바른생활’ 이미지를 벗어던지겠다는 처절함이 엿보인다. 일생일대의 도전에 나선 차인표를 만나 속내를 들어봤다. 
 

▲ 배우 차인표 ⓒ넷플릭스

배우 차인표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본인이 직접 쓴 것인지, 대중이 씌운 건지, 언제부터 쓰고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가면이었다. 그 가면은 여러 단어를 담았다. ‘봉사’ ‘기부’ ‘바른 생활’ ‘신뢰’ 등을 내포하고 있는 가면이다. ‘검지 흔들기’나 ‘분노의 양치질’과 같은 밈도 포함하고 있으나, 전자의 도덕적으로 고결한 이미지가 후자의 흠결을 압도한다. 

직접 쓴 가면
씌워진 가면

차인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이 꼭 싫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뢰감을 주는 그의 이미지를 광고계에서 마다할 리 없었고,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을 테니 나쁠 것도 없었을 것이다. 

1994년,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 안에> 1화가 방영된 뒤 연기 경험이 많지 않았던 27세 차인표는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 잔상이 너무 강렬해 ‘벼락스타’의 아이콘으로 불린다. 보수적이었던 한국 사회에서 상체를 노출하는 파격적인 장면을 비롯해 모든 것이 완벽한 강풍호의 이미지가 그대로 덧씌워지면서 방영 기간 내내 인기 절정의 스타로 떠오른다.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시기에 입대라는 강수를 둔다. 잊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기고 국민의 의무에 성실히 임한다. 이듬해 11월 <사랑을 그대 품 안에>에서 호흡을 맞춘 신애라와 결혼한다. 기존 연예인과는 다른 행보에 대중은 열렬히 지지한다. 


제대 후 10여년간 배우 활동에 매진한다. 이 시기 흥행작도 적지 않다.

MBC <그 여자네 집> <별은 내 가슴에> <영웅반란> <왕초> <황금시대> <영웅시대> <하얀거탑>, SBS <불꽃> <완전한 사랑> <대물> 등. 그가 주요 배역을 맡은 작품 대다수가 성공했다. <그 여자네 집>으로는 MBC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스타성은 최고였지만, 연기자로서는 인기만큼 평가받진 못했다. 최민식·송강호·설경구·이병헌처럼 극찬을 받는 연기자는 아니었다. 주로 드라마에서 활약했다. 예술성이 짙은 작품과는 인연이 없었다.

SBS 드라마 <홍콩 익스프레스>에서의 악역 연기는 대중으로부터 조롱을 받기도 했다. 지나치게 과한 설정 탓이었다.

스펙트럼이 넓은 편도 아니었다. <왕초>의 김춘삼 역이나 영화 <목포는 항구다>의 건달 역을 제외하곤 대부분 재벌 또는 엘리트 이미지가 강했다. 

넷플릭스 신작 <차인표> 색다른 도전
굳어진 이미지 깨기 위한 파격적 결심

2010년 전후로 작품 활동보다는 배우 외적인 일에 치중한다.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한국 컴패션’을 통해 어린이 구호 활동에 힘쓴다. 2012년 출연한 SBS <힐링캠프>에서 보여준 ‘양심을 실천하는’ 이미지는 ‘바른 생활 사나이’의 가면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5~6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2016년 무렵부터 차인표는 다시 배우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조금씩 작품 활동을 늘려 나갈 계획이었다. 그때 김동규 감독을 만나게 된다. 입봉도 하지 못한 이름 없는 감독이 <차인표>라는 제목으로 시나리오를 써왔다. 차인표를 매우 처절하게 희화화한 내용이었다. 차인표는 거절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극 중에서 그려지는 차인표의 처지가 현실의 제 처지와는 큰 괴리감을 보인다고 느꼈어요. 현실의 차인표가 저렇게까지 자발적으로 극 중의 차인표를 묘사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죠.”

지난 2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차인표>를 보면 차인표의 거절에 수긍이 간다. 1994년 이후 쌓아 올린 매력적인 이미지를 박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 신애라 역시 “굳이 이 작품을 할 거야?”라고 했단다. 
 

▲ 영화 촬영에 몰두 중인 배우 차인표 ⓒ넷플릭스

영화를 보면 2016년은커녕 2020년의 차인표로서도 ‘굳이 저 영화를 찍을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영화는 차인표를 바닥까지 끌어내린다. 

“이 작품을 거절할 당시에 배우로서 정체된 차인표가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거절했는데, 막상 4년이 지나고 보니 그 정체가 현실로 이어졌어요. 극 중 차인표나 저나 크게 다름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영화를 통해 변화해 보겠다고 다짐했죠.”

작품 활동을 다시 하려고 했는데, 그에게 손을 내미는 시나리오가 없었다. 직업이 배우인데 연기를 할 무대가 없었다. 미디어 시장은 커지는데, 오히려 차인표가 설 자리는 없었다. 2016년 KBS2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배우 차인표의 상황이 극 중 차인표가 겪는 상황보다 더 극한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몇 년째 놀고 있으면 생명이 끝난 배우인 거죠. 배우로서의 제 처지는 건물에 갇혀 있는 극 중 차인표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학생은 공부해야 학생이고, 배우는 연기를 해야 배우인데, 작품은 안 하고 다른 것으로 매체에만 나오면 그건 배우라고 할 수 없잖아요. 제 배우 생명이 극한에 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미지 고착
정체된 현실

위기감과 절박함이 그에게 휘몰아쳐서일까, 차인표는 <차인표>에서 그의 굳어진 이미지를 망가뜨리는 데 앞장선다.

현실의 차인표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데 반해 <차인표> 속 차인표는 자기객관화가 전혀 돼있지 않다. 현실의 차인표뿐 아니라 관객이 보기에도 극 중 차인표는 못났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광고 연출 감독의 주문에 ‘진정성’만 외치면서 촌스러운 열정을 내보이고,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시절에 머물러 검지만 흔들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착각한다. 연기 결과물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배우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던 영화가 자신을 제외하고 이미 촬영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제외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매니저 김아람(조달환 분)이 직언이라도 하면 ‘너는 진정성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한다’며 의견을 뭉개기 바쁘다. <차인표> 속 차인표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상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새로운 차인표의 코믹 연기가 눈에 띈다. 온몸에 진흙 물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여자 팬티를 입었다가 벗어던지기도 한다. 이미지를 위해 데뷔 후 단 한 번도 베드신을 하지 않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건물 더미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할 뿐 아니라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미지를 먼저 생각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장르의 이 영화는 관객에게 낯선 뭔가를 던진다. 배우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자신을 희화화할 뿐 아니라, 사실과 허구가 혼재한다. M.net에서 히트한 <음악의 신> 시리즈와 일맥상통한다. 

스스로를 처절하게 망가뜨리는 차인표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차인표는 단호하게 답했다.

허구와 실제
온몸 내던져

“이 영화 제목도 <차인표>이고, 저에 관한 내용이에요. 오랜만에 영화를 찍으면서 힘들다고 느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이분들이랑 더불어서 일하는 데 손색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마음을 다잡았어요. 꼰대같이 있지 않으려고 했고, 젊은 친구들한테 함부로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조감독님이 어린 편인데 끝까지 존댓말을 썼어요. 최대한 존칭을 쓰면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게 제가 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했어요. 나중에는 반말하는 사람들도 존칭을 쓰는 분위기가 되더라고요.”
 

▲ ▲배우 차인표 ⓒ넷플릭스

차인표가 온몸을 내던지며 연기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신선한 도전에 중점을 두는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영화적 완성도에 중점을 두는 관객은 혹평을 내린다. 모 아니면 도의 반응이다. 


특히 아쉬운 대목은 차인표가 너무 오랫동안 건물더미에 갇혀 있는다는 점이다. 진흙을 뒤집어쓴 그가 인근 여고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건물이 무너지면서 건물 더미에 갇히게 되는데, 구출되는 결말까지 너무 오랫동안 똑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건물더미에 갇히기 전 다양한 얼굴을 그린 차인표의 코믹 연기가 재밌다는 점에서 반복되는 장면에 대한 아쉬움은 배가 된다. 

“작품을 하면서 비슷한 갈증이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김동규라는 신인 감독이 제 초상권에 대한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놨어요. 허구와 실제가 공존하는 모호한 세계요. 그러고는 대본을 써서 제게 왔죠. 제가 하기로 했는데 ‘이건 맞고 이건 틀려’라면서 고친다면, 결코 영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김동규가 창조한 세상이 대중이 생각하는 차인표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연기에 임했어요.”

자신을 망가뜨리는 차인표는 촬영 중에 어떤 마음이었을까. 마냥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모호한 감정이 들었을 거라 예상된다. 마치 모호한 세계의 색감을 가진 영화처럼. 

“4년간 작품 활동 전무…생명 끝난 배우”
“이번 영화 내 배우 인생에 전환점 되길”

“솔직히 구차한 느낌도 들긴 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옷을 다 벗고 샤워장에 갇혀 있는데, 이런 것까지 찍는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 설정 자체가 영화 내에서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스스로 추레하다고 느끼다가 깔깔 웃기도 했어요. 구차함과 즐거움이 공존했어요. 찰리 채플린이 그랬잖아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제 마음도 그랬던 것 같아요.”

데뷔 후 24년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올바른 삶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이미지가 단 2시간 만에 무너졌다. 배우로서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추락이다.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미지를 변신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차인표는 오랫동안 굳어진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용단을 내렸다. 

“저 역시 다른 배우들처럼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미지를 조율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죠. 다재다능한 연기를 하는 배우로요. 저라고 왜 안 그러고 싶었겠어요. 작품을 통해 점진적으로 변화를 주면 좋을 텐데, 저는 이미지가 너무 굳어졌어요. ‘바른생활 사나이’라는 이미지가 기저에 깔려 있었어요. 나쁜 짓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베드신 한 번 안 한 몸이라는 대사가 있는데, 배우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역할도 그렇게 됐어요.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졌고, 혼자 빠져나가기 어렵다고 느낄 때 이 작품을 만난 거죠.”

올해 나이 55세인 차인표는 이번 신작을 통해 20대 관객과 소통하게 됐다. <차인표>가 준 선물 중 하나라고 한다. 
 

▲ ▲ⓒ넷플릭스

“제 나이에 젊은 관객에게 다가갈 방법은 별로 없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젊은 관객들과 소통하게 됐어요. 팬들이 생긴 것도 고맙고요. 오래전부터 저를 좋아해 준 팬분들도 과거 추억이 상기됐다면서 좋아해 주셨어요. 어떤 분은 ‘작품을 보고 나서 나를 돌아보게 됐다’고 피드백을 주셨어요.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소감이었어요. 감사한 면이 커요.”

새 건물을 짓기 전에 기존의 건물을 무너뜨리듯 차인표는 배우로서의 새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과거처럼 영광스럽게 주인공을 맡는 것이 아닌, 어떤 역할로든 작품과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이 작품이 배우 차인표의 인생에 ‘비포(Before)’와 ‘에프터(After)’를 가르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 형태가 꼭 배우가 아니어도 된다고.

비포
에프터

“평생 연기자가 되기보단 평생 연예계에서 같이 일을 하고 싶어요. 창작이든 제작이든 어떤 형태로든요. 기회가 된다면 연기도 하고요. 연기하면서 소질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그분들이 일할 기회를 작품으로 창출하고 싶기도 해요. 다시 한 번 잘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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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후폭풍> 윤석열이 삼킨 이슈들

[탄핵 후폭풍] 윤석열이 삼킨 이슈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불과 몇 개월 만에 온 천지가 쑥대밭이 됐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는 폐허로 변했다. ‘내가 옳다, 너는 틀렸다’ 갈등을 빚는 사이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공든 탑도 무너져 내렸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하는지 감도 안 오는 상황이다. 비로소 탄핵 정국이 끝났다. 지난해 12월14일 국회가 윤석열 전 대통령을 탄핵6 소추한 때로부터 111일 만이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로는 122일이 걸렸다. 역대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 중 가장 오랜 숙의 기간을 거쳤다. 결론까지 120여일 문제는 후폭풍이다. 12‧3 비상계엄 사태서 시작된 탄핵 정국은 4개월 만에 나라를 완전히 망가뜨렸다. 정치권은 정쟁에만 몰두했고 정부는 기능이 마비돼 공회전을 거듭했다. 그사이 국민 여론은 완전히 반으로 쪼개졌다. 사태를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컨트롤 타워는 붕괴했다. 무정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외교다. 특히 미국발 공격에 한국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당선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미 대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상 외교는커녕 실무진 간의 대화도 삐걱거렸다. 대통령 권한대행,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도 하지 못했다. 그사이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미국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우방국, 동맹 관계는 허울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듯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에도 관세를 부과했다. 당선 직후부터 스스로 ‘관세맨’이라고 칭하면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건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도 예외로 두지 않은 것이다. 지난 2일 미국 정부는 한국서 생산돼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제품에 25%의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관세 관련 행정명령에 서명하는 과정서 “미국 제품에 막대한 관세를 부과하고 산업을 파괴하기 위해 터무니없는 비금전적 장벽을 만들었다”며 “미국 납세자들은 50년 이상 갈취를 당해 왔으나 더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멕시코, 캐나다, 중국 등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언급하면서 통상 전쟁에 불을 댕겼다. 이번 발표는 미국발 통상 전쟁을 전 세계로 확산한다는 일종의 선언이나 다름없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국가별로 중국 34%, EU(유럽연합) 20%, 베트남 46%, 대만 32%, 일본 24% 등의 관세율을 적용했다. 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인 만큼 후폭풍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일본, EU 등보다 높은 상호관세율이 적용되면서 불리한 여건서 경쟁을 벌이게 됐다. 나름의 ‘믿는 구석’이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사실상 백지화되면서 미국과 새로운 통상 협정을 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관세뿐만 아니다. 지난달 15일 미국 정부가 한국을 ‘민감국가 및 기타 지정국가 목록’에 포함한 사실이 공식 확인됐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전인 지난 1월 초, 조 바이든 행정부가 결정한 조치로 파악됐다. 미국 에너지부는 국가안보나 핵 비확산, 지역적 불안정성, 경제 안보 위협, 테러 지원 등의 이유로 민감국가를 지정한다. 민감국가로 분류되면 원자력·인공지능(AI) 등 미국 첨단기술 분야와의 교류, 협력이 엄격하게 제한된다. 트럼프 취임 이후 대응 못 해 민감국가 지정 이어 관세 폭탄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는 한 언론서 관련 보도가 나올 때까지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민감국가 지정 사실이 확인된 뒤에도 지정 이유를 파악하지 못했다. 보안 문제에 따른 것일 뿐 양국 간 과학기술 협력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뜻을 고수하고 있다. 정치권은 민감국가 지정 배경을 두고 서로를 탓하며 정쟁을 벌였다. 정부의 안일한 인식과 달리 민감국가 지정은 한국 과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홍기원 의원실은 지난해 8월 작성된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의 ‘예측과학 학술 연계 프로그램(PSAAP) 제4기 모집 공고문’을 입수해 공개했다. 공고문에 따르면 “PSAAP 자금은 미국 시민이거나 비민감국가 출신 비미국 시민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고 돼있다. 민감국가 출신은 자금 지원에 제약이 따른다는 점을 명시한 것이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4일 “민감국가에 등재되더라도 한미 간 공동연구 등 과학기술 협력에 새로운 제한은 부재하다는 게 에너지부의 설명”이라고 밝혔다. 물론, 당시 조 장관이 언급한 ‘한미 간 과학기술 협력’에 해당 프로그램이 포함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민감국가 리스트는 오는 15일 공식 발효된다. 정부는 발효 전 한국을 리스트서 빼기 위해 막판 협의를 벌이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에 따른 방위비 분담금 압박도 거세질 전망이다.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중순께 ‘임시 국가 방어 전략 지침’으로 알려진 9쪽 분량의 문건을 배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문건에 따르면 국방부는 ‘인력과 자원의 제약을 고려해 여타 지역서의 위험을 감수할 것이고, 유럽과 중동, 동아시아 동맹국이 러시아와 북한, 이란 등의 위협 억제서 대부분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국방에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도록 압박할 것’이라고 적시했다. 한국과 미국은 내년부터 5년간 낼 방위비 분담금을 전년 대비 8.3% 올린 1조5192억원으로 이미 정했다. 2027년부터 2030년까지 소비자물가지수 증가율을 연동시키되 연간 인상률이 최대 5%를 넘기지 않도록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정부 때부터 한국이 지금보다 더 많은 방위비를 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재협상 가능성이 남아있는 셈이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언급하면서 북미 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서 ‘김 위원장에게 연락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미 1기 정부서 김 위원장과 직접 소통한 경험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화 재개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동맹도 내친 미국 대통령 이 과정서 ‘한국 패싱’ 가능성 또한 나오고 있다. 100일 넘게 탄핵 정국이 이어지면서 리더십 부재 상태가 계속된 부분이 리스크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다시 말해 북한과 미국의 대화에 한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그동안 북한 관련 대화는 주로 정상 외교를 통해 이뤄졌다. 내치는 더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해 12월3일 윤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후 민생은 뒷전이 됐다. 여야는 탄핵소추안 표결로 갈등을 빚었고 이후에는 탄핵 심판을 두고 서로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그사이 각종 문제가 불거졌지만 기능이 마비된 정부는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 179명이 사망한 제주항공 참사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2월29일 승객과 승무원 181명이 탑승한 제주항공 2216편이 무안공항서 동체 착륙을 시도하던 중 폭발했다. 승무원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사망한 참사로 오는 7일로 100일째에 접어들었다. 사고 원인 규명, 피해자 보상 등 문제가 산적해 있지만 계엄, 탄핵 등의 여파로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한참 동떨어진 모양새다. 일단 당국의 조사와 수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안타까운 점은 블랙박스에 사고 당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핵심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는 사고 현장서 수거된 항공기 블랙박스와 엔진, 주요 부품 등 사고 원인을 가늠할 수 있는 증거를 종합적으로 분석, 시험하는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북 의성서 시작돼 5개 시군으로 번진 대형 산불 피해도 만만찮다. 경북도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5개 시군의 피해 조사액은 8000억원에 이른다. 최종 피해액은 1조원을 훌쩍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산불로 주택 3987채가 탔다. 3915채가 전소됐고 30채는 절반 정도, 42채는 부분적으로 불에 탔다. 여기에 농작물 3785㏊, 시설하우스 423동, 축사 217동, 농기계 6230대가 화재 피해를 입었다. 인명피해도 26명이나 났다. 경북경찰청 형사기동대는 경북 산불로 사망자를 낸 혐의로 A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A씨는 경북 의성군 안평면 괴산리 한 야산에 있는 조부모 묘소를 정리하던 중 일대에 불이 나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A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MF보다 더 어렵다 정부, 기업, 연예인 등 각계각층서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있지만, 다 타버린 숲 등을 산불 이전 상태로 복구하는 데 수십년이 걸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자영업자는 최악의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로 연말연초 대목을 놓친 데 이어 탄핵 정국이 길어지면서 위축된 소비심리에 폐업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2일 여신금융협회의 ‘2025년 2월 카드승인실적’에 따르면 지난 2월 숙박, 음식점업 카드 승인 실적은 11조2100억원으로 전년 동월 대비 4320억원 줄었다. 국내 자영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외식업이 경영난에 허덕이는 상황과 궤를 같이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의 여파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비심리의 악화는 취미 생활 위축으로도 드러났다. 지난 2월 예술, 스포츠 및 여가 관련 서비스업 카드 승인 실적은 9600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0% 가까이 감소했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경기가 안 좋으니까 여가와 외식 소비가 줄어들면서 관련 업종이 전반적으로 부진하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영업자들은 빌린 돈은 갚을 수 없고 수입은 없는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다. 지난달 31일 한국은행이 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국민의힘 박성훈 의원과 행정안전위 소속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양부남 의원에게 제출한 ‘개인사업자 대출 세부 업권별 연체율’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말 저축은행 연체율(1개월 이상)은 11.7%로 나타났다. 직전 분기와 비교해 3개월 사이 0.7%p 올랐다. 2015년 2분기 이후 9년6개월 만에 최고 기록이다. 빚을 여러 곳에서 낸 다중채무자가 많은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다중채무자는 가계대출 기관 수와 개인사업자 대출 상품 수의 합이 3개 이상인 경우를 뜻한다. 지난해 4분기 말 자영업 대출자 가운데 다중채무자는 56.5%에 이른다. 대출액 기준으로 보면 70.4%에 달한다. 1인당 평균 4억3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27일 공개한 ‘금융안정 상황(2025년 3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취약 자영업자는 42만7000명으로 집계됐다. 소득이 적고 신용도가 작은 자영업자가 43만명에 육박한다는 뜻이다. 이들이 전체 자영업자 차주서 차지하는 비중은 13.7%에 이른다. 소비심리 위축되고 자영업자는 망하고 2021년 말 28만1000명에서 2022년 말 33만8000명, 2023년 말 39만6000명 등으로 증가하는 추세다. 이렇다 보니 아예 장사를 접는 자영업자도 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가 내놓은 ‘2025년 폐업 소상공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소상공인 10곳 중 4곳은 매출 부진 등의 사유로 창업 후 3년 이내에 문을 닫았다. 폐업 시점의 빚은 1억원을 웃돌았다. 조사 결과를 보면 3년 미만 단기 폐업자의 비율은 39.9%를 차지했다. 폐업 사유는 수익성 악화 및 매출 부진이 86.7%로 나타났다. 그 원인으로는 내수 부진에 따른 고객 감소가 과반(52.2%)을 차지했다. 인건비 상승(49.4%), 물가 상승으로 인한 원재료비 부담(46%), 임대료 등 고정비용 상승(44.6%) 등이 뒤를 이었다. 폐업 과정서 드는 비용도 평균 2188만원에 달했다. 송치영 소상공인연합회 회장은 지난 2일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만난 자리서 정치권의 대책을 요구했다. 송 회장은 “자영업자 수가 지난 1월 기준 두 달 만에 20만명이 줄고 수도권 상가도 공실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상공인과 민생을 위한 추경이 시급히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탄핵 정국이 마무리되면서 경제의 불확실성은 나름 해소 수순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표결이 부결된 이후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경제적인 관점서만 봤다고 전제하면서 “탄핵이 경제엔 더 낫다”고 말한 바 있다. 비상계엄, 탄핵 정국서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건이 급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전 정국을 뒤흔들었던 ‘명태균 게이트’가 다시 전면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한 언론은 지난 3일 명태균씨와 홍준표 대구시장 간의 의혹을 보도했다. 윤 전 대통령 내외와 홍 시장 부부가 회동한 사실을 거론하며 이를 명씨가 주도했다는 취지로 보도한 것이다. 민주당은 지난 3일 해당 내용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홍 시장 측근이 명태균을 통해 김건희 여사가 선호하는 동물 관련 기획을 전달했고 이를 계기로 부부 동반 회동이 성사됐다는 것”이라며 “명태균은 단순한 연결고리가 아니었다. 기획안을 준비해 김건희의 승인을 받고 회동을 성사시킨 핵심 인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만약 사실이라면 공직자가 민간인과 손잡고 대통령 부부와 지방자치단체장의 사적 회동을 주선한 것”이라며 “홍 시장의 권력 네트워크에 명태균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홍 시장은 지난 3월14일 명태균 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지면 정계 은퇴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묻혔던 사건 수면 위로? 시간상으로는 120일 남짓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한국에 남긴 상흔은 상당했다. 외부로는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내부에선 ‘IMF 때보다 힘들다’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무엇보다 뼈아픈 대목은 본연의 자리서 일했어야 할 국민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탄핵 정국이 지나간 자리에 결국 국민의 상처만 남은 셈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