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재벌 뒷조사’ 충격의 CIA보고서 공개

  • 박창민 기자 cmp@ilyosisa.co.kr
  • 등록 2017.01.31 12:03:29
  • 호수 10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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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후광으로 쑥쑥 컸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세상에 비밀은 없다. 최근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80년대 초 3대 재벌 총수들의 동향을 파악했던 보고서가 드러났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한국 3대 그룹인 현대·삼성·대우의 초대 회장의 프로필과 보고 내용이 담겨있다. 이들 재벌 총수는 CIA에 어떻게 비쳤을까.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지난 23일, 온라인에 공개한 기밀해제 문서 중 ‘한국: 경제적 의사결정의 과도기’(South Korea: Economic Decision Making in Transition. 1983년 1월)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당시 고위 경제관료에 대한 분석이 담겨있다. 또 한국 3대 재벌인 현대·삼성·대우 총수의 프로필과 이들에 대한 보고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병철·정주영
김우중…그들은?

CIA 보고서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재계와 한국 사회서 존경받는 인물’(Chong is a well respected is South Korean business circles and in Korean society in general) ‘미국에 호의적’(He is well disposed toward th United States) ‘전두환 대통령 경제 정책에 비판적인 인사’(Chong has generally been critical of President Chun Doo Hwan's economic policies) 등으로 분류했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정 회장은 현대그룹 창립자이며, 한국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다. 또 한국에서 가장 다국적인 기업을 이끌고 있으며, 당시 13만명의 노동자가 현대그룹 각 계열사(조선, 선적, 알루미늄, 자동차 부문)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CIA 보고서는 묘사했다.

이 보고서에는 “정 회장은 한국 언론이 ‘자수성가의 전형’으로 칭하는 백만장자”(Chong is a billionaire who has been described in Korean press as the 'archtype of the self man')이라고 평가했다.


80년대 국내 재벌 동향
미국 기밀문서 대방출

CIA는 정 회장이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고 보고 있다. CIA는 “정 회장은 정부가 직접적인 명령보다는 당근과 채찍으로 경제를 가이드하기를 선호하며 정부의 물가 통제에 대해서도 ‘실행 불가능’이라고 비판한 적 있다”(Chong favors government economic guidance through incentives and disincentives rather tan by direct fiat and has labeled direct government price controls as 'unworkable')고 말했다.
 

CIA는 이처럼 정 회장이 정부의 경제정책에 비판적이지만, 전 대통령 정부서 출범한 정부단체에 후원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CIA보고서에 따르면 “정 회장은 전 대통령 취임 후 정부가 후원하는 여러 경제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Chong's criticalsms of government's ecocomic policies, hs has been active in several government- sponsored organizations since Chun became President.)

정 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송전리 아산마을서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송전소학교를 졸업했으나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이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한 끝에 1937년 9월에 경일상회라는 미곡상을 시작했다.

1940년 서울서 가장 큰 경성서비스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다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하게 된다. 그 뒤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 이듬해 5월에는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건설업을 시작했다.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71년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한국경제 이끄는
재벌들 동향 왜?


CIA 보고서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을 ‘한국 최대의 무역회사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대기업’(South korea's oldest and largest trading corporation and one of the country's largest conglomerates) ‘자본주의의 강력한 지지자’(Lee, in his seventies, is a strong proponent of capitalism) ‘삼성은 전통적으로 정부와 거리를 두는 편’(kept government at arm's length) 등으로 분석했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장은 삼성그룹의 창립자이며, 1980년대 삼성은 포춘이 선정한 세계 500대 기업 중 125위를 차지했다. 또 1981년에는 5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 GNP의 8%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 회장을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업가라고 언급했다. CIA는 “이 회장은 한국의 10년간 경제 성장은 자본주의 체제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He cites the capitalist system as the reason for the country's rapid growth in recent decades)라고 언급했다.

CIA는 삼성이 당시 재벌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장은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 개입을 반대한다”(Lee advocates the internal direction and modification of industries and opposes government interference in private business practices)며 “정부에 협력적인 자세를 취하는 현대나 대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A marked contrast to the approach of cooperation and involvement Hyundai and Daewoo have taken)고 평가했다.
 

보고서에는 또 이 회장이 박정희정권 시절 구속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CIA는 “이 회장은 1960년대 박정희정권에 의해 체포됐지만 경제 발전을 돕겠다고 대통령을 설득해 풀려났다”(Lee was arrested in the early 1960s by the Park regime but convinced President Park to release him and let him assist in building the country's economy unde Park's leadership)고 언급했다.

실제로 이후 삼성은 박 대통령의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완전한 지지를 선언, 그의 주요 지지기반인 전경련도 이 회장이 주도적으로 설립했다. CIA는 또 이 회장이 박 대통령의 비공식 경제고문단 역할을 했으며, 울산산업단지를 설립하는 데 일조했다고 보고 있다.

이 회장은 1910년 경상남도 의령 출생으로 2남2녀 중 막내다.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했지만, 1934년 중퇴했다. 1936년 경남 마산서 협동정미소를 세워 사업에 투신한 후, 1938년 3월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1951년 부산서 삼성물산을 세워 무역업을 하면서 1953∼1954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사업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 초대 회장에 선출됐다.

숨겨진 비화도
문서에 담겼다

CIA 보고서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대우는 기적의 기업’(Daewoo has become known as a miracle company)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 중 한 명으로 부상’(Kim has emerged as one of the country's leading industrialist) ‘김 회장은 1년의 절반 정도를 해외서 보낸다’(As chairman. Kim spends about half of each year abroad)고 언급했다.

CIA 보고서에 따르면 김 회장의 대우그룹은 1981년 7만500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2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대우그룹은 1967년도 직물회사로 설립됐으며, 이후 사업군을 확장해나갔다.
 

당시 김 회장은 저개발국가를 중심으로 사업확장을 했다고 CIA는 보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대우는 김 회장이 가장 큰 기회가 있다고 믿는 저개발국가의 점유율 확대에 집중해왔다”(Daewoo has emphasized capturing markets in underdeveloped countries, where Kim believes the greatest opportunity for profit exits)고 언급하고 있다. 1982년에는 김 회장은 전 대통령과 함께 아프리카 4개국을 방문하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을 체결했다.


현대·삼성·대우 회장 분석 
신상과 배후·정치성향 담겨

CIA는 대우의 약점도 분석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몇몇 전문가는 대우는 해외의 경제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는 점이 큰 약점이라고 주장했다”(Some observers have stated that Daewoo's major weakness is its dependency upon economic conditions abroad)고 설명했다.

또 CIA는 김 회장의 사업 성공이 박 대통령과 인연에서 비롯됐다고도 분석했다. 보고서는 “대우의 성공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도움의 결과일 수도 있다”(It's prosperity may also be the result of the personal support it received from the late President Park) 며 “박 대통령과 대우의 관계는 박 대통령이 학창시절 대구서 김 회장 아버지의 제자로 있을 때부터 시작됐을 수 있다”(Park's connection with Daewoo may date from his school days in Taegu, when he was a student of Kim's father)고 분석했다.

김 회장은 1936년 대구서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가 납북되자 15세에 홀어머니 아래서 소년가장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도맡게 된다. 휴전 후 상경해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고 1956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학창생활을 보냈다.

당시 경제관료
동향까지 파악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 충무로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시장서 성공해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 수출탑 달성에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됐다.


CIA 보고서에는 전 대통령의 경제 정책과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 김준성 경제기획원 부총리 겸 장관, 강경식 재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등 당시 주요 경제관료들에 대한 분석도 포함됐다.


<cmp@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CIA 기밀문서 대방출, 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기밀이 해제된 1300만 쪽 분량의 문서를 공개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미 뉴욕포스트 등에 따르면 이 기밀문서에는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의 심리실험과 미확인비행물체(UFO), 초능력 등 흥미로운 자료들이 공개돼 있다. 한국전과 베트남전쟁 등 냉전시대 전쟁 당시 해당기관들의 활동도 포함됐다.

이날 CIA는 약 93만건, 1300만 쪽에 달하는 기밀문서를 온라인상에 공개한다고 공지했다. 1995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25년 이상 지난 CIA 문건들은 보안을 해제하고 공개해 ‘역사적 가치’를 공유하라는 시행령을 발효했기 때문이다.

특이한 기록중에는 정신능력과 텔레파시를 다루는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문서들이 포함돼 있는데, 이중 70∼80년대 초능력자로 이름을 날렸다가 사기와 조작 파문 등을 겪은 유리 갤러의 초능력에 대한 연구 기록도 들어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유리 갤러는 다른 방에서 그려지는 그림을 부분적으로 복제 할 수 있었다. 복제한 정확도는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나 때로는 정확한 정확도를 보였다. 연구원은 “자신의 초자연적인 지각 능력을 설득력 있고 모호하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 주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한국전쟁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주요 열강들의 개입 가능성과 시나리오, 정치적 입장 등을 담은 보고서도 눈에 띄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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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대문’ VS ‘어대명’ 차이 해부

‘어대문’ VS ‘어대명’ 차이 해부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한민국의 흑역사’가 10년도 안 돼 반복되고 있다. ‘평행이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비슷한 양상으로 흐르는 모양새다. 하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전혀 다른 그림이 보인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다를까? 2024년 12월은 국민에게 충격과 공포의 시간이었다. 45년 만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서 가결됐다. 현직 대통령은 법정형이 사형과 무기징역, 무기금고뿐인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고 있으며 사상 초유의 체포 작전도 진행 중이다. 여기에 여객기 사고로 179명의 아까운 목숨도 잃었다. 8년 만에 재연됐다 순서의 차이만 있을 뿐 10여년 전 우리나라는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로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됐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서 가결됐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인용하면서 파면됐다. 2000년대 들어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서 가결된 사례는 세 번이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2016년 박 전 대통령,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헌재서 탄핵안이 기각되면서 직무에 복귀했다. 직무가 정지된 윤 대통령은 헌재의 탄핵 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불과 8년 새 두 명의 보수 진영 대통령이 헌재 심판대 위에 섰다. 사건의 발단부터 전개, 절정, 결말에 이르기까지 멀리서 보면 비슷하게 흘러가는 듯하지만 가까이에서 볼수록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단적인 예로 박 전 대통령은 ‘태블릿PC’ 보도가 불씨를 댕겼다면 윤 대통령은 12·3 비상계엄 사태가 시발점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안 가결-헌재의 탄핵안 인용-특검 수사-사법 처분 등의 과정을 거쳐 단죄됐다. 특검 수사가 진행되는 사이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궐위된 때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고 돼있다. 2017년 5월9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보궐선거가 열렸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윤 대통령의 상황은 박 전 대통령보다 복잡하다. 헌재의 탄핵 심판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등의 내란죄 수사가 동시에 이뤄지면서 양쪽에서 압박하는 형국이다. 윤 대통령의 내란 혐의는 대통령의 불소추특권도 소용없는 중범죄라서 수사 속도가 박 전 대통령보다 훨씬 빠른 상태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 호감도 만큼 비호감도↑ 정치권의 눈은 조기 대선에 쏠려 있다. 헌재는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을 최우선에 놓고 심리 중이다.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퇴임하는 4월18일 이전에 윤 대통령의 파면 여부가 결정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탄핵안이 인용되면 6월경에는 헌정사상 두 번째 대통령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여야 잠룡들은 헌재의 탄핵안 인용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다. 파면이 결정된 날부터 두 달 사이에 대선을 치러야 하기에 기존에 인지도와 지지율을 어느 정도 확보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정치권은 물론 국민의 눈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쏠리는 이유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이 대표는 압도적인 차기 대권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위 그룹과 큰 격차를 보이면서 1위위로 질주하는 중이다.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차기 대통령 적합도를 조사한 결과 이 대표가 3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오세훈 서울시장(7%), 홍준표 대구시장(7%),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5%),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4%) 등이 뒤를 이었다. ‘없다 또는 모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32%였다. 이번 조사는 국내 통신 3사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가상번호(100%)를 이용한 전화 면접으로 이뤄졌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서 ±3.1%포인트, 응답률은 22.8%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스트레이트뉴스>가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지난 4~6일 만 18세 이상 200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차기 대권주자 적합도 조사에서도 이 대표는 45.1%를 얻었다. 홍준표 대구시장(9.7%),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7.8%),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7.2%), 오세훈 서울시장(6.1%) 등이 뒤를 이었다. 빠르면 6월 보궐선거로 이 대표의 지지율은 여당 후보 5인(홍준표·한동훈·원희룡·오세훈·안철수)의 지지율을 모두 합한 수치(33%)보다 오차범위 밖에서 높았다. 이번 조사는 휴대전화 100% RDD 방식으로 실시했고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2.2%포인트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와 조원씨앤아이 홈페이지 참조). 최근 정치권에서 조기 대선 가능성과 함께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8년 전 박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나돌았던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과 일맥상통하는 표현이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당시 문 전 대통령의 상황과 현재 이 대표의 상황은 천차만별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문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서 박 전 대통령에게 밀려 낙선했다. 당시 대선은 제3당 후보 없이 보수 후보와 진보 후보의 맞대결로 치러졌다. 양측 모두 짜낼 수 있을 만큼 모조리 다 짜낸 선거서 패하자 문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이후 지지세를 회복하기까지 꽤 긴 시간을 암흑기로 보냈다. 문 전 대통령을 야권의 압도적인 대선주자로 만든 결정적 한 방은 국정 농단 사태였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의 존재가 드러났고 파생 의혹이 쏟아졌다. 1300만명(누적)의 국민이 거리로 나왔다. 국민적 인기를 등에 업은 문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헌재서 인용될 무렵 ‘차기 대통령’으로 완벽하게 눈도장을 찍은 상태였다. 하지만 현재 이 대표의 상황이 당시 문 전 대통령과 비슷한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여론조사 수치상으로는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다는 말이 들린다. 이 대표가 가진 사법 리스크에 더해 ‘비토층’이 상당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윤 대통령도 싫지만, 이 대표도 싫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는 분석이다. 전면 나오면 공격거리 많아 실제 최근 나온 여론조사에서 이 대표는 호감도, 비호감도 모두 1위를 기록했다. <뉴스핌>의 의뢰로 미디어리서치가 지난 6~7일 이틀간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차기 대통령 후보 중 가장 호감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39.1%가 이 대표를 꼽았다. 오세훈 서울시장 9.5%, 홍준표 대구시장 9.3% 등이 뒤를 이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 가장 호감이 가지 않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도 이 대표는 40.8%로 단연 1위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3.5%, 홍준표 대구시장이 12.2% 등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호감도 1~4위(이재명·오세훈·홍준표·원희룡)와 비호감도 1~4위가 같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여야의 대선후보군이 어느 정도 추려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김대은 미디어리서치 대표는 “대선후보군은 ‘이재명 1강’ 독주 속에 범여권의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지는 양상”이라며 “범여권 유력 후보의 지지율을 모두 합쳐도 이 대표 한 명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또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마저 탄핵 정국을 거치며 한 달 만에 지지율이 한 자릿수로 떨어지면서 ‘이재명 대항마’는 사실상 실종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 대표의 비호감도 1위 원인으로는 사법 리스크를 지목했다. 이 대표는 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 때 불거진 대장동 개발비리 특혜 의혹서 시작된 사법 리스크를 여전히 벗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재판만 5개고 검찰서 추가로 수사 중인 사건도 2개다.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과 위증교사 의혹은 1심 판결이 나왔다. 특히 공직선거법 위반 재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당선무효형이 나오면서 대선행에 빨간불이 켜졌다. 대법원서 형이 확정되면 이 대표는 10년간 피선거권이 제한된다.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날 수 있는 수준이다. 발목 잡는 사법 리스크 박 때와 다른 보수 결집 위증교사 1심 재판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항소심서 뒤집힐 가능성이 있다. 실제 법조계에서는 선고 전 공직선거법 위반보다 위증교사 혐의의 유죄 가능성을 더 크게 봤다. 위증교사 혐의는 양형 기준에 따라 무죄 아니면 징역형이 선고될 수 있어 항소심서 판결이 바뀌면 이 대표는 벼랑 끝에 몰리게 된다.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윤석열정부가 출범하기 전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상대 후보의 공격 포인트 역시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에 집중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은 12‧3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면서 대통령과 그 배우자가 연루된 의혹과 논란에 크게 실망했다. 윤 대통령이 퇴장하고 이 대표가 대선후보로 검증을 받기 시작하면 타격이 상당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보수층의 결집이 심상찮은 점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박 전 대통령 탄핵 당시 보수 진영은 친박(친 박근혜)과 비박(비 박근혜) 등으로 사분오열했다. 탄핵안 표결 당시 찬반이 갈리면서 물리적으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졌다. 실제 박 전 대통령의 탄핵안은 재적의원 299명 가운데 찬성 234표로 가결됐다. 당시 야당과 야당 성향 무소속 의원 표는 171표였다. 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표수(200표)는 29표였지만 그보다 많은 63표가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서 나왔다. 당이 쪼개질 수밖에 없는 이탈표였다. 반면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는 2번의 표결 끝에 간신히 정족수를 넘겼다. 찬성은 204표로 국민의힘서 12표가량의 이탈표가 나왔다. 탄핵안이 가결된 뒤에도 국민의힘은 강경 지지층을 등에 업고 결집 중이다. 민주당은 ‘윤석열 지키기’에 나선 보수층과 국민의힘의 힘을 빼기 위해 ‘머릿수’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이 과정서 중도층의 이탈이 표면화되는 모양새다. 애매한 표수 걸림돌 될까 박 전 대통령의 탄핵으로 궤멸 직전까지 몰렸던 보수층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는 태도로 대응하는 점은 민주당은 물론 이 대표에게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명확하게 지지 후보를 밝히지 않은 유보층이 상당하다는 점을 봤을 때 중도층을 놓치면 대권서 멀어질 수 있다. 진보 진영의 지지만으로는 ‘어대명’은 완성될 수 없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