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표적 수사와 제 식구 감싸기 등 검찰이 남긴 ‘흑역사’는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묻힐 뻔한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고 정치권과 재벌의 비리를 파헤친 ‘백역사’도 존재한다. 78년 만에 퇴장을 앞둔 검찰의 빛났던 순간들을 되짚어봤다.
검찰청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1948년 출범한 검찰청은 오는 10월2일 폐지되고 기존 검찰이 맡아왔던 수사와 기소 기능은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나뉜다. 수사와 기소를 한 손에 쥐었던 검찰 중심의 형사사법 체계도 78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뒤집힌 결론
검찰의 긴 역사에는 성과만큼이나 적지 않은 논란과 과오도 함께했다. 정치적 중립성 논란부터 과잉·표적 수사, 피의사실 공표와 제 식구 감싸기까지 검찰의 막강한 권한을 둘러싼 논쟁은 정권을 가리지 않고 되풀이됐다. 그렇다고 78년의 역사를 온통 ‘흑역사’로만 채울 수는 없다.
수사기관이 내린 결론을 다시 확인해 놓친 범죄의 실체를 밝혀내고, 복잡하게 얽힌 돈의 흐름을 추적해 거대 기업과 정치권의 비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도 검찰이었다. 때로는 한번 내려진 판단을 스스로 뒤집으면서까지 사건의 진실을 다시 좇기도 했다.
검찰청 폐지를 불과 보름여 앞둔 지금도 그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검찰이 보완수사로 진실을 밝혀낸 ‘광주 여고생 살해범’ 장윤기 사건에서다. 장윤기는 지난 5월 광주 광산구의 한 보행로에서 일면식도 없는 고등학생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붙잡혔다.
경찰은 장윤기가 개인적인 분노를 엉뚱한 피해자에게 표출한 것으로 보고 일반 살인 등의 혐의를 적용해 검찰에 넘겼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휴대전화와 블랙박스, 차량 데이터 등을 다시 분석했다.
그 과정에서 장윤기가 피해자를 자신의 차량 쪽으로 끌고 가려 했고, 차량 뒷문이 일정 시간 열려 있었던 점, 차 안에서 케이블타이가 발견된 점 등에 주목했다. 과거 외국인 여성을 상대로 저지른 성폭력 범행과 수법이 유사하다는 점도 함께 살폈다.
검찰의 결론은 달랐다. 단순한 분풀이 살인이 아니라 피해자를 납치해 성폭행할 목적으로 접근했다가 저항하자 살해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일반 살인이 아닌 ‘강간 등 살인’ 혐의를 적용해 장윤기를 구속기소했다. 이후 보완수사 과정에서는 현직 경찰관인 장윤기의 부친이 주요 증거물을 폐기한 정황까지 드러났다.
장윤기의 부친이 아들의 원룸에 있던 훼손된 리얼돌과 과거 사용하던 휴대전화 등을 없앤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경찰이 초기 감식을 마치고 가족에게 돌려준 차량에서는 검찰의 압수수색을 통해 장윤기의 범행 전 행적이 담긴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도 뒤늦게 확보됐다.
장윤기·정인이 추가 수사로 실체 규명
범행 목적·고의 살인까지 다시 밝혀내
장윤기의 부친이 사건 수사팀과 수십 차례 연락을 주고받은 데다 압수수색과 구속영장 신청 등 주요 수사 상황을 전달받은 정황까지 나왔다. 검찰은 담당 경찰관들을 공무상비밀누설·증거인멸 혐의 등으로 입건해 수사에 나섰다.
친족의 증거인멸을 처벌하지 않는 형법상 특례 때문에 부친에게 증거인멸죄를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경찰청은 감찰에 착수해 그를 정직 처분한 상태다.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이른바 ‘정인이 사건’도 검찰이 죄명을 바꿨다. 2020년 10월13일 생후 16개월 된 입양아 정인양은 심정지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가 끝내 숨졌다. 사망 전날부터 스스로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해 있었고, 몸은 야위었지만 배만 볼록하게 부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부검 결과는 더 참혹했다. 복부에 강한 외력이 가해지면서 췌장이 완전히 절단되고 장간막까지 파열됐으며, 늑골과 머리 등에서는 이전 폭행으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골절 흔적도 발견됐다.
경찰은 양모 장씨를 아동학대치사 혐의로 검찰에 넘겼고, 검찰 역시 같은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이후 검찰은 정확한 사망 원인과 살인의 고의 여부를 다시 따지기 위해 법의학자들에게 재감정을 의뢰하고 대검 차원의 심리·행동 분석을 진행했다.
전문가들은 아이를 떨어뜨리거나 심폐소생술을 하는 정도로는 췌장이 완전히 절단되고 장간막이 찢어지는 손상이 발생하기 어렵고, 강한 둔력이 가해져야 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
검찰은 이를 토대로 장씨가 정인양이 숨질 가능성을 인식하고도 강한 충격을 가했다고 판단했다. 결국 첫 공판에서 기존 아동학대치사 혐의를 예비적 공소사실로 돌리고 살인죄를 주된 혐의로 추가했다. 법원 역시 장씨가 정인양의 복부에 강한 둔력을 가해 췌장 절단과 장간막 파열을 일으켰다고 판단해 살인죄를 인정했다.
1심은 장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항소심은 징역 35년으로 감형했지만 살인죄 판단은 유지됐다. 대법원에서도 징역 35년이 확정됐다.
검찰이 정치권과 재계를 동시에 뒤흔든 순간도 있었다. 2003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이하 중수부)가 벌인 불법 대선자금 수사다. 시작은 SK해운의 분식회계와 비자금 의혹이었다.
대기업 장부 뒤 숨은 수십조 비리 적발
검은돈 따라가 정치권·재계까지 겨눠
검찰은 자금 흐름을 쫓는 과정에서 SK 비자금 일부가 정치권으로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고, 수사는 자연스럽게 2002년 대선 당시 여야 정치권의 불법 정치자금 전반으로 번져갔다.
수사가 깊어질수록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거액의 정치자금도 모습을 드러냈다. LG는 현금 150억원을 트럭에 실어 전달했고, 현대자동차 역시 승합차에 현금 50억원씩을 싣고 두 차례에 걸쳐 100억원을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거액의 현금을 차량째 넘겼다는 의미에서 이른바 ‘차떼기’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삼성 역시 채권과 현금 등 거액의 불법 대선 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검찰의 칼끝은 한쪽만 겨누지 않았다. 한나라당뿐 아니라 당시 노무현 후보 캠프의 자금 흐름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민주당 대선 계좌가 압수수색되는가 하면, 대통령 측근과 여야 정치인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2004년 중간 수사 결과 한나라당 측의 불법 대선 자금은 823억여원, 노무현 후보 캠프 측은 113억여원으로 잠정 집계됐다.
수사 규모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이었다. 대검 중수부는 전국에서 검사 20명과 수사관 80명을 투입해 약 9개월간 수사를 이어갔다. 기업 한 곳의 비자금에서 출발한 수사는 대기업과 여야 정치권을 아우르는 정경유착 문제로까지 커졌다. 검찰이 단서를 따라 수사 범위를 넓히면서 그동안 관행처럼 숨어 있던 대선 자금의 실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대형 경제범죄를 파헤친 검찰 수사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이다. 2000년 금융감독원이 대우 계열사들의 회계 부정을 적발해 검찰에 고발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당시 금감원이 파악한 분식회계 규모만 22조9000억원에 달했다.
대검 중수부가 수사에 나서면서 규모는 더 커졌다. 계열사 회계 자료와 자금 흐름을 추적한 결과 5개 계열사의 분식회계 규모가 41조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를 토대로 금융기관에서 약 10조원에 가까운 대출을 받아낸 사실도 밝혀졌다. 해외 비밀 금융 조직을 통한 자금 이동까지 수사 대상에 올랐다.
검찰은 전·현직 경영진과 계열사 관계자 등을 무더기로 재판에 넘겼다. 외환위기 전후 한국 경제를 뒤흔든 대기업의 부실이 단순한 경영 실패를 넘어 조직적인 회계 조작과 금융 범죄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수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끝까지 추적
검찰은 숱한 논란과 과오를 남겼지만, 모든 순간이 흑역사였던 것은 아니다. 묻힐 뻔한 진실을 다시 꺼내고 권력과 자본의 비리를 끝까지 파헤친 순간도 분명 존재했다. 검찰청은 사라지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수사와 사법 통제의 기능을 새 체계에서 어떻게 이어갈지는 남은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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