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부터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하던 한 청년은 을사늑약 강제 체결 소식을 듣고 항일 민족운동에 동참해 고국에 귀국했습니다.
침략 원흉과 매국노 처단 계획에 스스로 지원했으며 첫 대상은 이토 히로부미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기했지만 앞선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먼저 이토를 처단했습니다.
이 소식에 국내 매국 세력으로 눈을 돌렸고 마침 이완용이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1909년 12월22일, 성당 문 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해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이완용이 나오자 그대로 달려들어 품에 숨겨둔 단검으로 허리를 찌르고, 이완용이 도망치려고 하자 3곳을 더 찔렀습니다.
직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
안타깝게도 이완용은 의료진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폐에 치명상을 얻어 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다 훗날 폐렴으로 뒤늦게 눈을 감았습니다.
한편 체포 후 일본인 순사와 판사가 공범이 누구냐고 추궁하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라고 태연히 말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에도 “나는 죽어 수십만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해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며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에 대한 굳은 신념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1910년 9월 30일 사형이 집행됐는데요.
바로 독립운동가 이재명, 그의 나이 22세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