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잦아졌다. 너무 자주 일어나서 피해자조차 시큰둥할 정도다. 규모와 범위가 나날이 커지는데도 처음 사건이 발생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잠잠하다. 문제는 피해자가 가만히 있으니 관련자들 또한 조용히 넘어갈 구실을 찾는다는 점이다.
한 누리꾼은 “이제 더 이상 ‘개인’ 정보가 아니다. 공공 정보”라고 한탄했다.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개인정보 유출 사건에 질린 듯한 기색이었다. 각종 업체들에서 이름, 성별, 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부터 주문 명세, 결제 이력 등 사생활을 엿볼 수 있는 내용까지 싹 다 털렸다.
피해자도
업계에 따르면 지난 9일 기준으로 열흘 남짓한 기간에만 국내 주요 기업과 플랫폼에서 8건 이상의 개인정보 유출‧침해 사고가 일어났다. 미용‧의료 플랫폼 ‘강남언니’, 연예기획사 하이브가 운영 중인 글로벌 팬덤 플랫폼 ‘위버스’, 뷰티 플랫폼 ‘화해’, 패션 플랫폼 ‘29CM’ 등 업종도 다양했다.
지난 7일 강남언니 운영사 힐링페이퍼는 공지를 통해 4일 상담 내역을 조회하는 연동 기능에 비정상 접근이 발생해 일부 고객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고 밝혔다. 힐링페이퍼에 따르면 유출 인원은 21만9665명에 달한다.
유출 항목은 이름, 전화번호, 이메일, 생년월일, 성별, 거주 국가‧지역, SNS 로그인 아이디 등이 포함됐다. 특히 이용자가 상담을 신청한 이벤트‧시술명, 병원명, 의사명, 예약 희망 시간, 상담 동기와 상담 진행 상태 등 민감 정보도 유출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2차 가해 우려가 제기됐다.
위버스에서도 40만명 이상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위버스 컴퍼니는 지난 3일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으로부터 외부 제보자가 위버스 서비스의 보안 취약점을 제보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자체 점검과 긴급 대응을 진행해 42만2584만여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됐음을 확인했다.
위버스 컴퍼니에 따르면 유출된 항목은 내부식별정보로, 이용자 가입 시 내부적으로 사용자 식별을 위해 생성되는 내부 번호 값이다.
화해는 지난 4일 일부 회원의 이벤트 배송지 정보(이름, 휴대폰 번호, 우편번호, 주소, 상세주소) 또는 리뷰 게시글을 통해 공개된 회원 정보(닉네임, 성별, 출생연도, 피부 고민)가 조회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29CM도 지난달 27일 개인정보 유출 사실을 안내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객 이름 13만8841건과 이메일 주소, 휴대전화 번호, 배송정보 등이 포함된 2만1011건이다.
무엇보다 충격을 안긴 건 CJ그룹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에서 3954만개에 이르는 계정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이었다. 앞서 지난 5월 말 티빙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일어났고 이후 4개월에 걸친 조사가 진행됐다.
지난 4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민관합동조사단은 “활성 계정 2206만개뿐만 아니라 현재 사용되지 않는 휴면 계정 850만개와 탈퇴 계정 887만개에서 성명, 생년월일, 휴대전화 번호, 이메일 CI 등 20개 항목 70종의 정보가 유출됐다”고 밝혔다.
다만 조사단 측은 “티빙 자체 계정(726만개) 외에도 CJ ONE 통합 계정(863만개), 네이버‧카카오‧애플 연동 간편 가입 계정(2247만개)이 중복으로 집계돼, 3954만명이 피해를 봤다는 뜻은 아니”라고 밝혔다. 실제 피해자 수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중복을 가려 추후 확정할 예정이다.
10일 만에 8곳 탈탈
쥐꼬리 보상에 분노
올해 초부터 각종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서 티빙 건은 유독 ‘미운털’이 박히는 상황이다. 실제 업체 측의 사후 대처가 이용자의 눈높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보상안 발표 이후 반응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던 온라인 쇼핑 플랫폼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티빙은 지난 7일 개인정보 유출 피해자를 대상으로 보상 신청을 받는다고 밝혔다. 보상은 자동 지급 형태가 아닌 신청 방식으로 진행된다. 로그인과 본인 확인을 거쳐 계정 단위로 보상이 이뤄지기에 티빙을 이미 탈퇴한 회원도 재가입 절차를 거쳐야 한다.
보상은 ▲해킹‧피싱 안심보험(DB손해보험) 1년 무료 가입 ▲3개월간 프리미엄 시청 기능 ▲티빙 포인트 50p ▲엔터테인먼트 혜택 등이다. 티빙에 따르면 보험을 포함한 전체 보상안의 1인당 체감 가치는 2만원 상당으로 추산된다. 이 같은 보상은 오는 30일까지 신청한 피해자에 한해 주어진다.
보상안 발표 이후 부정적인 기류가 확산하고 있다. 보상안의 규모가 너무 작다는 의견과 함께 신청 방식을 두고도 재가입을 유도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쿠팡이 개인정보 유출 이후 5만원 상당의 보상안을 제안하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와 이용도가 적은 카테고리를 끼워 넣어 논란이 됐던 지점과 유사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개인정보 유출 자체에 대중이 무뎌지고 있다는 점이다. 통신사, 쿠팡 등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사회가 들썩인 이후에도 같은 사건이 거듭 반복되자 대중도 지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미 노출된 정보가 또 한 번 유출된다고 해서 별다른 일이 일어나겠냐는, 자포자기한 듯한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 같은 현상의 배경엔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정보 유출 사실이 알려지면 업체 측은 사과와 함께 재발 방지를 약속한다. 동시에 정부는 대대적인 조사, 강력한 제재 등을 언급한다.
조사 결과가 나오고 피해 규모가 확정되면 업체 측은 보상안을 내놓는다. 일부 피해자는 집단 소송에 참여한다. 대체로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지면 이와 비슷한 수순을 밟는다.
그러나 개인정보 유출 건으로 업체가 큰 타격을 입는 일은 많지 않다. 역대 최고, 천문학적인 수준의 과징금 부과 등의 결정이 나오긴 하지만 이마저도 업체 측에서는 액수를 줄이기 위한 소송전에 돌입한다. 그사이 시간은 흐르고 사건은 흐지부지된다. 사건 초반 입었던 타격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쿠팡의 사례가 딱 이랬다. 정치권은 물론 이재명 대통령까지 언급했지만 사건 이후에도 쿠팡은 여전히 잘나가고 있다. 심지어 미국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하면서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본질 자체가 흐려지기도 했다. 미국 정치권에서 쿠팡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우리나라가 진행하는 제재 수위와 통상 문제를 엮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내정 간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시들해져
이용자 수도 역대 최고 수준으로 반등했다. 지난해 11월 말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일어나고 약 10개월 만에 이른바 ‘초고속 회복’을 한 셈이다. 지난 9일 아이지에이웍스 모바일 인덱스에 따르면 쿠팡의 지난 8월 신용‧체크카드 추정 결제액은 4조9301억원으로 G마켓(2477억원)과 11번가 (2414억원), SSG닷컴(2383억원)을 합친 금액의 6.8배에 이르렀다.
월간 이용자 수도 3595만명으로 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저점이었던 3364만명에서 231만명이 늘었고, 유출 전인 지난해 10월(3438만명)과 비교해도 157만명 늘었다. 쿠팡 사건 이후 대항마로 여겨졌던 대체 플랫폼은 결제액과 이용자 수가 일제히 하락했다. 쿠팡의 아성은 여전히 견고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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