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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대로’ 양당의 선동 역사학

‘입맛대로’ 양당의 선동 역사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정치가 역사·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진영마다 다르다. 하지만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사실과 검증을 뒤따르게 만든다는 공통점은 있다. 더불어민주당 일각은 정치적으로 친화적인 영화에 역사적 의미와 권위를 부여하고, 국민의힘 일각은 이미 확립된 역사적 판단을 다시 논쟁의 영역으로 끌어낸다. 서로 다른 길을 걷지만 종착지는 같다. 양당의 ‘선동 역사학’은 결국 반지성주의를 마주보게 한다. 영화사에 걸작으로 남은 선전·선동 영화로 구소련의 1925년 작 <전함 포템킨>과 나치 독일의 1935년 작 <의지의 승리>를 거론할 수 있다. 이 영화들은 관의 전폭적인 제작 지원을 받은 관제 영화였지만, 당시로서는 참신하고도 획기적인 촬영 기법을 통해 극한의 선전·선동을 수행하면서 역사에 남았다. 말보다 강한 장면 <전함 포템킨>은 각각의 쇼트를 연결하면 제3의 감정·개념이 발생한다는 판단 아래 몽타주 기법을 선보였다. 포템킨 전함의 수병이 먹을 고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면, 구 러시아 제국의 체제가 부패했다는 감각이 만들어진다. 오데사 계단에서 벌어지는 학살극은 군인들의 군화와 겁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 등을 빠르게 교차하며 묘사한다. 이어 어머니가 쓰러지고 아기를 태운 유모차 한 대가 계단을 내려간다. 실제 화면에 등장하는 폭력의 양보다 관객이 체험하는 학살의 규모가 훨씬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의지의 승리>는 아돌프 히틀러의 초월적 지도자상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하지만 직접 강조하지는 않는다. 히틀러가 탄 비행기가 구름 위를 날아오고, 그 아래로는 독일의 도시가 펼쳐져 있다. 비행기가 착륙한 후에는 히틀러가 등장한다. 그야말로 웅장한 신의 강림이다. 이어 펼쳐지는 것은 ‘하나의 지도자’와 질서정연한 수십만의 군중이다. 이 구도에 개인은 없다. 지도자와 군중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민족 공동체인 것이다. “전체주의가 옳다”는 말 대신 ‘하나의 지도자’와 수많은 사람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듯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문화 생산·배급에 직접 개입해 선전·선동을 수행할 수 있었다. 나치 독일도 영화산업을 강하게 통제·지원하면서 영화를 이데올로기 전달 수단으로 적극 이용했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정당이 특정 영화를 직접 주문 제작해 자신의 역사관을 주입하는 방식은 일반적이지 않다. 정치와 문화는 보다 간접적으로 만난다. 대표적인 방법은 정치인이 특정 영화를 관람한 후 의미를 부여하거나 공개적으로 추천·평가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두둔하는 영화가 비판을 받으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규정하면서 방어하기도 한다. 자신의 세계관과 친화적인 작품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공개적으로 찬양·추천·옹호하고, 작품이 가진 정치적 메시지의 확산을 돕는 것이다. 정치적 지위와 진영의 상징 자본을 이용해 특정 작품에 역사적·도덕적 권위를 부여하는 방향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 <암살자(들)> 개봉 이후 많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치인이 영화를 두둔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언급했다. 하지만 작품의 역사적 암시를 둘러싼 반발도 거세다. <암살자(들)>은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범인 문태광(박정민 분)을 움직였을 수도 있는 배후로 ‘중정 윗선’을 거론한다. ‘중정 윗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진 말이다. ‘중앙정보부 내 윗선’으로 해석하면 신직수 당시 중앙정보부장 등 간부들로 해석할 수 있다. 반대로 ‘중앙정보부를 움직이는 더 높은 권력’으로 해석하면 박정희 당시 대통령까지 연상할 수 있다. 영화는 영화라더니 픽션에 역사 입히는 정치 예술의 진영 가치화…국힘에 대가·책임·처벌? 연출자 허진호 감독은 지난 2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이 영화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을 지시한 영화라는 어떤 재단을 해놓고 보신다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애초부터 분리해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권력을 지키는 게 아내의 목숨보다 중요하다면?”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때문에 허 감독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아울러 당시 사건과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는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사건과 하나의 서사로 연결해 의문을 제기하는 주인공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유신 정권의 언론탄압은 이전부터 존재했고 자유언론운동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오히려 긴급조치는 육 여사 사망 이후 일부 해제됐고, 유신 비판 운동은 이후 더욱 확산됐다. 이 같은 ‘시간차 눈속임’ 때문에 허 감독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이어지는 측면이 있다. 또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가 <야당> <남산의 부장들> <메이드 인 코리아> <서울의 봄> 등 군사 정권·정보기관·권위주의 시대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드라마를 반복적으로 제작해온 점도 논란을 증폭시키는 배경으로 자리 잡는다. 이 때문에 보수 진영에서는 작품 자체를 넘어 제작사의 역사관을 의심하는 반응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당 정치인의 <암살자(들)> 두둔도 영화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강해지고 있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지난 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암살자(들)> 극우 정치권 홍보가 아니라 작품성으로 매일 매진 매진!”이라며 “대박 납니다. 신납니다”라고 썼다. 이어 “극우들이 바라는 대로 육영수 여사도 제작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편력도 만들면 히트? 육 여사님은 우아하시겠지만, 박정희의 편력은?”이라며 “영화는 영화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같은 당 서영교 의원도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주연 배우 유해진씨가 자택 앞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하기로 결정했다는 언론 보도를 공유하면서 “극우와 국힘(국민의힘)에 그 대가를! 책임을! 처벌을!”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극우 그리고 국힘, 그 영화 보기는 했나? 보면 감동할 걸? 영화 진짜 잘 만들었어. 작품성 최고!”라고 강조했다. 나치 독일의 문화·예술관은 정치적 세계관을 최상위 가치에 둔 후 그 세계관에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문화·예술의 가치를 평가했다. 우호적인 문화에는 권위를 부여했고 적대적인 문화에는 ‘퇴폐적’이라는 낙인을 찍고 배제했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 정치인의 영화 추천과 국가 권력으로 문화 생산 자체를 통제했던 나치의 문화 정책은 그 성격과 강도가 전혀 다르다.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세계관이 예술의 가치 판단에 개입하는 방식이다. 예술의 진영화 박 의원은 먼저 “영화는 영화”라고 전제하면서도 “양식 있는 국민 모두가 관람하는 게 영화를 살리고 유해진을 돕는 길”이라면서 <암살자(들)> 재관람 캠페인까지 제안했다. <암살자(들)>의 흥행 추이도 정치적 공방의 일부로 해석했다. 박 의원은 <암살자(들)>을 정치적 연대 행위의 매개물로 만들었다. 예술작품을 진영 연대의 상징으로 소비한다는 측면에서 나치 문화 정치와 추상적인 공통점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작품의 미학적·역사적 타당성을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누가 공격하고, 우리 진영이 방어해야 할 작품인지’라는 정치적 좌표가 작품의 가치 판단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예술의 진영적 가치화’라고 할 수 있다. 서 의원의 발언은 “국민의힘과 극우는 책임·처벌의 대상이고, 그들이 공격하는 문화상품은 감동적이고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문장으로 독해될 수 있다. 겉으로는 유씨의 자택 앞 시위에 대한 책임·처벌을 주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다만 문법적으로는 ‘극우’뿐 아니라 국민의힘까지 책임과 처벌의 대상으로 병렬해 놓은 것으로도 읽힌다. 서 의원은 긍정적 문화와 부정적 정치집단을 한 문맥 안에 동시에 설정했는데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나치는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 작품에 ‘건강한 독일 예술’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면서 반대편에는 ‘퇴폐적’ ‘볼셰비키적’ ‘유대적’이라는 정치적·도덕적 낙인을 찍었다. 박 의원은 개인적 영화 감상을 진영적 집단행동으로 전환했다. 서 의원은 정치적 가치 판단과 미학적 가치 판단을 결합했다. 예술을 정치·진영의 영역으로 확장해 그 작품을 공격하는 반대 세력과의 전투를 동시에 이야기한 것이다. 이들의 미학적 평가는 정치적 소속감과 분리돼 제시되지 않았다. 이들 외에도 민주당에서는 최민희·김영배·노종면·박성준·전용기·강득구 의원 등이 영화 <암살자(들)>을 두둔했다. 이들의 논리는 대체로 묘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겉으로는 “영영봐(영화는 영화로 봐)”를 거론하고 ‘표현의 자유’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일부는 “역사를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라며 작품에 실제 역사적 의미까지 부여하기 때문이다. 역사적 정확성에 대한 책임은 ‘픽션’이라는 말로 낮추면서 작품의 정치적·도덕적 권위는 ‘역사적 성찰’이라는 말로 높이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9장에서 시인의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단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개연성 또는 필연성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봤다. 허구의 힘은 사실을 마음대로 바꾸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개연성을 통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그래서 문학에서는 핍진성이 중요하다. 허 감독은 분명히 ‘박 전 대통령 사주설을 암시한다’는 해석을 부인했지만 사주설을 암시하는 독해는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독의 의도만으로 작품이 실제 만들어낸 독해를 봉합하기는 어려워진다. 책임은 빼고 권위 높이고 영화가 어떤 추론을 만들어냈느냐는 문제에 더 강한 의미가 붙었고, 그 의미를 정치인들이 다시 증폭시키고 있다. 예술의 자율성보다 사상적·사회적 기능을 우선했던 일제강점기 카프의 목적문학론도 일부 연상되는 대목이다. <암살자(들)>을 연일 비판하는 국민의힘도 여기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국민의힘에서는 전신 자유한국당 시절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비하·왜곡하는 발언들을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2019년 열린 공청회에서 자유한국당 이종명 전 의원은 “5·18은 폭동이었다가 정치 세력 때문에 민주화운동이 됐다”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 김순례 전 의원도 “5·18 유공자는 괴물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이진숙 의원은 최근 5·18을 성역화했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이 참여한 토론회를 개최해 논란을 불렀다. 국민의힘 김태규 의원은 지난달 30일 JTBC 유튜브 채널 ‘장르만 여의도’에 출연해 “윤석열은 내란이냐, 아니냐?”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변했다. 이어 “전두환은 내란이냐”라는 질문에도 “내란 아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김 의원은 판사 출신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97년 전두환·노태우씨에 대해 12·12 군사 반란과 5·18 과정의 내란죄를 확정했다. 당시 대법원은 신군부가 군 지휘권과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비상계엄 전국 확대·국보위 설치 등을 통해 헌법기관의 권능을 강압적으로 무력화했다고 판단했다. 논란이 되자 김 의원은 지난 2일 입장문을 통해 “제 발언은 비록 진의는 그렇지 않더라도 오해를 초래할 빌미를 제공한 부분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표현에 더욱 신중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이 “윤석열·전두환은 내란이 아니”라고 주장한 계기는 영화 <암살자(들)> 비판 과정에서 비롯됐다. 김 의원 스스로도 “발언을 한 현장은 영화 <암살자(들)>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을 문제 삼아 패륜적이고 반인륜적인 영화를 창작이라는 허울 속에서 만든 것을 문제 삼는 자리였다”고 밝혔다. 이어 “6·25나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과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창작의 자유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무자비한 난도질을 하고, 5·18에 대해서는 형사 처벌이 가능한 입법을 만들어 성역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였다”고 덧붙였다. 다시 흔드는 5·18…판결보다 정치적 확신 금기 파괴의 정치학…확신이 검증 이긴다? 유감을 표하면서도 김 의원은 ‘5·18 성역화’라는 문제의식은 유지했다. 영화라는 장르 예술의 틀을 빌려 역사적 의미를 확장하는 민주당 일부의 방식과 달리, 국민의힘 일부에서는 확립된 역사적 판단 자체를 다시 논쟁의 영역으로 돌리려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같은 ‘금기 파괴의 정치’는 나치 돌격대가 보여준 행동주의적 정치 문법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물론 오늘날 정치인의 발언과 준군사 조직이 행사했던 물리적 폭력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비교 가능한 것은 복잡한 현실을 적과 아군으로 단순화하고 논증·절차보다 진영의 확신과 행동성을 앞세우는 태도다. 국민의힘 일각에서 제기하는 ‘5·18 성역화’ 프레임 역시 역사적 사실의 재검증과 별개로 “남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가 말한다”는 금기 파괴 자체에 정치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의 정치적 적이 독점한 역사이므로 다시 깨뜨려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한다면, 무엇을 새로 밝혀냈느냐보다 금기에 도전했다는 행동성 자체가 중요해진다. 양당이 역사·문화를 정치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반지성주의로 수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미 필요한 정치적·도덕적 결론을 정한 후 지식을 그 목적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 회로는 진영적 욕망 → 동기화된 추론 → 반증 저항 → 독립적인 검증 절차의 가치 하락 → 반지성주의 순서로 움직인다. 정치학·정치심리학 연구에서 반지성주의는 대체로 전문가·지식인·전문적 지식에 대한 일반화된 불신 또는 가치 절하를 뜻한다. 동기화된 추론 자체가 곧 반지성주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불리한 전문가 판단과 판결, 검증 절차의 권위를 지속적으로 낮추는 방향으로 이어지면 반지성주의와 만날 수 있다. 한쪽은 진영에 친화적인 역사 서사를 접하면서 사실성과 허구의 경계를 느슨하게 허용하고, 작품의 역사적 효용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거나 권장한다. 다른 한쪽은 대법원 확정 판결과 축적된 역사 연구보다 정치적 확신을 우선시해 기존 판단 자체를 다시 의견의 영역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양당 일부 정치인의 역사 소비가 ‘선동 역사학’이라 부를 만한 정치 문법으로 기울고 있는 셈이다. 진실 판정을 내 손 안에? 정치가 진실을 판정할 권리를 자신에게 가져오려고 하는 순간 좌우를 막론하고 반지성주의가 시작된다. 원하는 정치적 결론 때문에 증거의 자격 자체를 선택적으로 인정하거나 거부한다면, 이 역시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는 나치 정치 문화의 핵심 태도 중 하나였다. 무엇이 진실인지 독립적으로 탐구하도록 두지 않고 어떤 역사와 예술에 권위를 부여할지를 정치적 세계관이 결정했다. 양당은 그렇게 서로 반지성주의와 선동 역사학으로 마주 보고 서 있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