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눈만 뜨면 새로운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 사람들은 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찾을까. AI가 단 몇 초 만에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지금, 제작사들은 오히려 수천 년 전 이야기에 거액을 베팅하려 든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얘기. 진부한 것인 줄로만 알았던 신화와 설화, 전설과 민담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시 ‘돈 되는 콘텐츠’로 확산하고 있다.
지난 5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3000년 된 옛날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를 바탕으로, 전쟁 후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이를 스크린에 옮긴 동명 영화 <오디세이> 얘기다. 그리스 신화를 다룬 이 작품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 <오디세이>는 지난 24일 기준 1일 관객 18만6597명, 누적 관객 729만5949명을 기록하며 박스오피스 전체 1위를 지켰다.
<오디세이>
흥행 열풍
23일 연속 예매율 1위 기록도 세웠다. 몇달 전 개봉한 영화 <군체> 예매율 기록(22일)을 넘어 올해 최장 기간 예매율 1위다. 영화 <오디세이>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맷 데이먼 분)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지속한 10년 여정, 그를 기다리는 아내 페넬로페(앤 헤서웨이 분) 이야기를 교차해서 그린다.
<오디세이>는 흥행 기세를 타고 극장가를 넘어 SNS로까지 완벽하게 뻗어나가는 중이다. 작품 속 명장면은 쇼츠와 릴스 챌린지, 밈 등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관객이 단순히 관람하는 데서 멈추는 대신, 자발적인 2차 창작 콘텐츠를 선보이며 트렌드를 이끄는 것.
가장 큰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단연 ‘오디세우스 챌린지’다. 극 중 오디세우스만이 활에 시위를 걸고 도끼 사이로 화살을 쏠 수 있다는 데서 착안했다. 이런 영화 속 활시위 패러디 장면을 저예산 코스프레로 재현하는 등 영상이 쏟아지고 있다.
치명적인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돛대에 묶인 채 절규하는 오디세우스의 모습 역시 일상 속 다양한 상황과 결합하며 인기 밈으로 변신한다. ‘다이어트 중 음식 냄새를 맡은 내 모습’ 등 누구나 공감하는 일상을 영화 속 장면에 대입한 패러디물을 다양한 온라인 채널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놀란 감독은 이번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를 밝히며, “영화감독으로서 아직 채워지지 않은 영화 영역,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것을 늘 찾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또 “내가 자라면서 봐온 수많은 신화 영화가 있었지만,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예산과 IMAX 스케일이 만들어낼 수 있는 무게감과 진정성으로 구현된 신화는 아직 본 적이 없다”고 설명했다.
놀란 감독과 할리우드가 공감한 셈법은 단순해 보인다. 오랫동안 전해져 온 이야기일수록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것. 맷 데이먼부터 톰 홀랜드, 앤 해서웨이, 로버트 패틴슨, 젠데이아까지. 내로라할 톱스타들이 대거 <오디세이> 귀향길에 함께 몸을 실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트로이 전쟁 신화가 대형 스크린에 오른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04년 개봉작 <트로이>도 같은 신화(정확히는 <일리아스>)를 원작으로 삼았다. 20년 터울로 같은 신화가 두 번이나 대작 영화 재료가 됐다. 두 작품은, 같은 원전도 각 시대 요구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두 작품이 보여주는 결은 조금 다르다. 볼프강 페터첸 감독이 만든 <트로이>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두 영웅의 대결을 중심으로 트로이 함락까지 전쟁 과정을 다룬다. 신의 개입을 배제한 인간 중심 전쟁 서사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오디세이>는 전쟁을 끝낸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10년 여정을 다룬다. 동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겪는 죄책감을 동반한 고통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아내와 아들, 개와 함께하는 가족 서사도 빼놓지 않았다. 또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나 마녀 키르케, 세이렌 등 신화 특유의 초자연적 존재를 풀어놨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예산 쏟아
‘IMAX 스케일 진정성’에 담은 여정
두 영화를 본 이들은 어떤 작품에서 트로이 목마가 더 정교하고 아름답게 제작되었는지, 만듦새를 비교 평가하는 재미를 추구하기도 한다. 또 <트로이>를 다시 한번 봐야 하는 게 아니냐며 인기 역주행을 예고하기도 했다.
고대 신화를 재구성해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 흐름이 영화에서만 머무르지는 않는 듯하다. 디즈니+ 오리지널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들>은 2023년부터 그리스 신화를 미국 10대 청소년들의 모험담으로 재탕하고 있다. 첫 시리즈부터 흥행에 성공하더니, 오는 11월20일에는 시즌3 공개를 예정했다.
방대한 세계관 속에서 여러 사람 입을 오르내리며 더욱 탄탄해진 그리스 신화가 영화 <트로이>와 <오디세이>, 시리즈물 <퍼시 잭슨> 등을 오가며 계속 거듭나고 있다. 할리우드에 있어 그리스 신화는 마르지 않는 소재 창고다.
신화를 탐하는 콘텐츠는 그리스와 로마를 넘어 더 먼 곳으로 뻗어나간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토르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천둥 신을 그대로 슈퍼히어로로 옮겨온 캐릭터다. 오딘, 로키까지 합세한 신화 속 인물 관계는 마블 코믹스와 영화 전체 뼈대를 이루고 있다.
월트디즈니 컴퍼니가 애니메이션 두 차례, 실사 영화 한 차례로 선보인 <모아나>도 유사 사례다. 하와이·뉴질랜드·타히티 등 태평양 섬들에 걸쳐 전해지는 폴리네시아 구전 전승 신화와 항해 전설을 가져다 썼다. 이처럼 콘텐츠가 훑는 신화는 국적을 불문한다.
지난 28일에는 넷플릭스가 오래된 이야기를 빼 들었다. 한국 구전설화, ‘손톱 먹은 쥐’를 모티브로 삼은 시리즈 <들쥐>다. 손톱을 먹은 쥐가 손톱 주인으로 둔갑해 진짜 사람 행세를 한다는 이야기다. 극 중 소설가 문재(류준열 분)는 정체불명의 존재 들쥐에 이름도, 얼굴도 포함해 인생 전체를 빼앗긴다.
돈을 되찾으려는 사채업자 노자(설경구 분), 사건을 쫓는 형사 순용(이규형 분)까지 들쥐와의 싸움에 얽히며 추격전이 벌어진다. 원작은 카카오웹툰. 옛날이야기의 뼈대에 ‘정체성 도둑질’이라는 요즘 스릴러 코드를 살로 붙였다.
<들쥐>도
꺼내다
김홍선 감독은 <들쥐>를 “한순간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찾는 추적을 시작하는 스릴러”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본을 읽으면서 문재의 감정에 동화되기도 하고, 문재를 응원하기도 하고, ‘들쥐’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안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밝혔다.
주인공 류준열은 “설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글로벌 시청자들과 만난다는 점에서 굉장히 끌렸다. 뒷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빨리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대본이었다”며 합류 이유를 들었다.
설경구는 “인물들의 불안과 의심, 공포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문재와 함께 진실은 무엇일지, 진짜는 누구일지 추측하면서 찾아가는 데서 느끼는 몰입감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이규형은 <들쥐>에 출연하게 된 계기를 말하며 “누군가 내 삶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 소름이 돋으면서 이 작품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어린아이 때 TV 애니메이션으로, 혹은 동화책으로 봤던 이 구전설화는 어쩐지 공포심을 유발한다.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없는 순간, 가장 가까운 사람조차 나를 못 알아보고 가짜를 진짜로 믿는 상황. 신분과 정체성이 파편화된 요즘 사회에서는 이 상황이 설득력 있는 공포가 된다.
옛이야기 속 두려움이 시대를 건너 여전히, 혹은 오히려 더 강하게 통한다는 뜻이다.
<들쥐>만이 현대적 재해석을 거친 이야기를 다루는 최근작은 아니다. 지난해 방영한 tvN 드라마 <견우와 선녀>는 ‘견우와 직녀’ 설화를 죽을 운명을 지닌 소년과 무당 소녀의 10대 로맨스로 풀었다.
같은 해 공개한 KBS2 드라마 <트웰브>는 12지신을 히어로물로 재해석해 선보였다. 마동석·박형식·서인국 등 초호화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으며 디즈니+로 전 세계에 동시 공개했다. 지상파 3사와 넷플릭스가 짜기라도 한 듯 할머니가 잠들기 전까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를 쏙쏙 뽑아왔다.
마르지 않는
소재 창고
지난해 가장 뜨거웠던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옛날이야기 콘텐츠로서 정점을 찍었다. 소니 픽처스 애니메이션이 만들고 넷플릭스가 배급한 이 작품은 K팝 걸그룹으로 활동하면서 밤엔 악령 사냥꾼으로 사는 세 멤버 이야기로 전개된다.
매기 강 감독은 작품 제작 이유를 한국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 이 작품에는 구미호, 도깨비, 저승사자 등 한국 신화와 무속 이미지가 세계관 전체에 짙게 깔려 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부터 성인 스릴러까지. 나이도 장르도 가리지 않고 신화와 설화 자산이 재가공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그 이유로 ‘위기 관리’를 꼽는다. 영상 콘텐츠 제작은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는 고위험 산업이다. 따라서 조회 수와 별점으로 시장성이 검증된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콘텐츠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2025 웹툰 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국내 웹툰 산업 매출은 약 2조2856억원, 이 중 드라마화 콘텐츠가 2차 저작물 매출의 38.3%를 차지했다.
신화와 설화는 이 논리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인다. 웹툰 시장은 검증 기간이 길어야 몇 년이라면, 신화·설화는 수백년에서 수천년째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이미 오랜 시간 검증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 시대와 세대를 넘은 생명력이 곧장 보편적 공감의 증거가 된다.
저작권이 이미 소멸한 퍼블릭 도메인이라는 것도 큰 이점이다. 판권 계약도, 원작자 협의도 필요 없다.
스토리텔링 관점에서도 설명이 된다. 신화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서로 다른 문화권의 신화가 놀랍도록 비슷한 서사 구조를 공유한다는 점에 긍정해 왔다. 영웅의 여정, 정체성의 상실과 회복, 금기와 위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모험.
오디세우스의 귀향이든, 들쥐에게 정체성을 뺏긴 소설가의 이야기든. 결국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 고민과,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다’는 회귀 구조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얻을 만하다는 뜻이다.
넷플릭스는 지난 6월3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에서 열린 ‘K-컬처 익스플레인드’ 행사에서 K-콘텐츠의 글로벌 확산 전략을 소개했다.
옛날 스토리에 더한 요즘 스릴러 코드
설화에 덧바른 주제 ‘정체성 도둑질’
이 자리에서 김미후 넷플릭스 한국 마케팅 부문 디렉터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K-콘텐츠를 어떻게 이야기하게 할 것인가가 마케팅의 출발점”이라며 “좋은 이야기가 국경을 넘어 더 큰 문화적 순간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이는, 특정 국가나 시대에 갇히지 않는 보편적 원형 서사일수록 국경 넘기가 쉽다는 논리와 맞닿는다.
신화와 설화, 전설과 민담을 기반으로 제작한 콘텐츠는 특정 국가나 플랫폼만의 전략이라기보다는 국적을 가리지 않는 보편적 카드로 작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렇게 흥행한 콘텐츠는, 원전 하나에서 시작한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재해석된다는 보편성 역시 지닐 수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 설명이다.
오디세우스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장면은 기원전 독자에게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었다. 놀란 감독은 같은 장면이 21세기 관객에게 영화적 스펙터클로 다가오도록 설계했다. 여기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는 인간 고유의 감정 묘사를 덧칠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이 반복해서 경험하는 감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떠나는 행위에서 오는 상실, 귀환을 재촉하는 사랑과 질투와 복수심,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살아남고 싶은 욕망과 성장. 오디세우스 서사에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이 관통하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검증된 원전에만 기대는 전략이 반복될수록, 정작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하고 투자하려는 시도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익숙한 신화와 설화를 재탕한다는 인상을 주는 순간, 관객과 시청자의 피로감은 오히려 역효과로 돌아올 위험도 있어서다.
실제 그리스·로마 신화를 좀 아는 관객은 <오디세이> 플롯이 지루하다는 평을 내고 있다.
<들쥐>는 옛 설화가 지니는 고풍스러운 시대 감각을 벗어던지고, 빠르게 전개하는 스릴러로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전래동화 감성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는 치밀한 연출이 있었다. 결국 관건은, ‘원전을 얼마나 다른 각도로 다시 쓰느냐’에 달렸다는 뜻이다.
<오디세이>와 <들쥐>. 국적도, 장르도 딴판인 이 두 작품이 동시에 관객과 시청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 콘텐츠 업계는 약속이나 한 듯 옛날이야기를 그러모으고 있다.
진실은 무엇
진짜는 누구
디즈니는 오래전부터 이 공식대로 움직였다. 유럽에서 구전되던 민담과 동화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디즈니가 이 이야기 원형을 그대로 복원한 것은 아니다. 노래를 만들어 붙이고, 캐릭터를 다시 설정하고, 새로운 갈등을 추가하고, 시대에 맞는 감정선을 집어넣었다.
디즈니가 오랜 시간 걸어온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나이가 아니었다. 얼마나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느냐였다. 고전의 생명력은 계속 바꿔 말할 수 있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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