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김득중 여순사건 보고서 작성단장

“인력도 예산도…정부, 관심 있지만 지원은 부족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썼다.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문구는 과거사 연구가 ‘옛날이야기’를 기록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사건이 현대에 미친 영향과 평가를 동시에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과거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3기가 출범했고, 내년 70주기를 맞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총망라하는 진상 규명 보고서도 한창 작성 중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당시의 문제를 짚어낼 만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이 향상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활발해진
과거사 연구

여순사건 연구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박사 학위를 받은 김득중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이하 여순사건 위원회)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 기획단(이하 보고서 작성단) 단장은 “사회의 민주화 진전 정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과거 민주화가 되지 않은 시기에는 과거사에 관한 관심이 적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야가 밝아지고 넓어지면서 인권의 측면에서 옛날에 일어난 사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1948년 10월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1일까지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해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여순사건 위원회와 보고서 작성단은 2021년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출범했다. 김 단장은 지난해 11월 2기 보고서 작성단의 총 책임자로 발탁됐다. 그는 늦어도 내년 10월까지 여순사건 보고서를 완성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여순사건 보고서가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여순사건 위원회 사무실에서 김 단장을 만났다. 김 단장을 비롯한 집필진은 보고서 작성을 위한 워크숍으로 사흘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는 “보고서의 서술 기조,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회의다. 집필진이 각자 맡은 바 주제가 다른데, 서로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쓸 것인지를 논의하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빨갱이의 탄생> 1호 박사
부임 첫날 직원 3명 있어

김 단장은 여순사건 연구의 권위자다. 그가 여순사건으로 박사 논문을 쓴 이후 펴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은 역사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그는 “책 제목을 본 학계 관계자들이 ‘김득중은 교수를 포기했나’라고 말할 정도였다”며 웃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다.

1997~199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자료 대한민국사>라는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김 단장은 전국의 중앙지와 지방지를 모두 봐야 하는 일에 투입됐다. 당시로부터 약 50년 전의 기사를 발췌해 일종의 사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때 김 단장은 여순사건에 대해 처음 ‘제대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1948년 10~11월 기사를 보고 이상한 점을 느꼈다. 당시 나는 여순사건을 여수,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적 사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일단 사건 규모가 매우 컸고, 좌익이나 남로당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민간인이 정말 많이 죽었는데도 나를 비롯해 당시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통신사 AP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보도도 김 단장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보도는 6‧25 한국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피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김 단장은 “AP의 노근리 사건 보도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나도 그 이후로 계속 공부해 박사 논문을 쓴 다음 <빨갱이의 탄생>이라는 책을 냈다”고 설명했다.

<빨갱이의 탄생>은 ‘빨갱이’라는 단어가 이데올로기나 사상적 배경에서 온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김 단장은 빨갱이를 그런 이념적 개념이 아닌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응축된 단어라고 봤다.

민간 피해
학살 수준

김 단장은 “실제 수십 년간 사용된 빨갱이의 용례를 보면 내가 싫은 사람들, 내가 적대하는 사람들,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붙이는 멸칭으로 사용됐다.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 인사도 빨갱이라고 불렀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상성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적대시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지칭하고 짓누르는 반공 체제는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심지어 반공이 국시로까지 여겨졌다. 정계, 학계, 교육계, 언론계 등 한국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동원됐다”고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여순사건은 ‘빨갱이’로 대표되는 반공 체제의 기원이 된다는 게 김 단장의 생각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반공 사회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으로 한국 전쟁을 꼽는데, 나는 그보다 2년 전에 일어난 여순사건이 그 좌표를 찍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까지 50년 이상 한국 사회가 반공을 제1의 가치로 두고 삶을 영위해온 배경에 여순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김 단장에게 여순사건 보고서 작성 업무가 남다르게 여겨지는 이유다. 그는 “역사라는 게 굉장히 방대하고 다양한 사건과 연계돼 있지 않나. 그래서 방계로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다”며 웃었다.

이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공부가 여순사건 보고서를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생의 과업,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정부의 지원이 아쉬운 점도 있다고 피력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출범한 1기 보고서 작성단이 여순사건에 대한 전문성 부족, 유족‧시민단체와의 갈등으로 1년 반 만에 해체 수순을 밟은 뒤 김 단장이 2기 단장으로 뽑혔을 때만 해도 기대가 상당했다. 한 연구자는 “이제야 딱 맞는 사람이 단장 자리에 앉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기 파행
“적합자”

하지만 부임과 동시에 김 단장이 마주한 건 열악한 작성단 상황과 1기 보고서 작성단이 남겨 놓은 허술한 기록뿐이었다. 그는 “딱 출근했는데 보고서 작성과 관련한 직원이 3명밖에 없었다. 그 직원들에게 1기 때 뭘 했냐고 물었더니 주로 연구 용역 발주, 관리 일을 했다고 하더라. 보고서 관련 작업을 한 건 없냐고 했더니 ‘가목차’ 하나를 건네줬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김 단장은 청와대, 국회, 정부 등을 쫓아다니며 인력과 예산을 요구했다. 그가 요구한 인력은 15명. 당연직 등으로 분류된 인원이 아닌 보고서 작성을 위해서만 15명이 필요하다는 게 김 단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 보고서 작성 당시 집필 인원이 그 정도 된다. 여순사건은 발생 범위와 규모가 제주 4‧3 사건보다 넓고 큰 편이라 3명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토로했다.

발 벗고 뛰었지만 현재까지 확보한 인원은 5명으로, 김 단장까지 포함하면 집필진은 6명이 전부다. 김 단장은 “이제는 집필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인력과 예산 투입이 돼도 그걸 활용하기 어렵다. 집필진이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배분이 이뤄졌고 자료 수집도 마무리 단계다. 정부가 조금 더 빨리 지원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정부, 국회 모두 보고서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 언제 보고서가 완성되는지 자주 묻는다. 하지만 보고서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의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고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지원이 부족하다. 여순사건을 포함해 과거사에 대한 논의가 이재명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아쉬운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반공 체제의 기원이 된 사건”
“과거 기록 넘어 현대에 도움”

그럼에도 김 단장은 정말 ‘완성된’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몇십 년 동안 숨죽여야 했던, 현대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여순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은 이제 유족이나 시민단체, 혹은 지역을 넘어 사회적 요구가 됐다고 강조했다. 또 여순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위치도 간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예로 들면 과연 그 사건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직접적으로 그 과정을 겪은 건 광주, 전남 지역이었지만 5‧18은 한국 사회에 현재까지 아주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0년대 군부 독재, 1987년 6월 항쟁, 지역 갈등 등 사회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의 배경에 5‧18이 있다. 역사적으로 계기가 큰 사건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이어 “여순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여순사건 보고서가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록을 넘어 가치 평가, 해석 등의 작업을 거쳐 현대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도록 작성돼야 하는 이유다. 그걸 하지 못하면 그저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여기에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김 단장은 “빨갱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배제와 혐오의 논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사회는 서로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그게 역사를 만든다. 한국 사회는 그 차이를 확인한 뒤 그 한쪽의 절멸을 의도했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이게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를 대하는 태도였다”고 전했다.

혐오와 배제
고리 끊어야

또 “이런 식의 논리를 가진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혐오와 배제가 극단으로 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 게 여순사건이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가는데, 국가는 그걸 애국이라고 포장해 줬다. 이 과정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이 고리를 끊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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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종합특검팀이 종료됐다. 12·3 내란과 관련된 수사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은 경찰 국수본으로 이첩됐다. 검찰 특수본과 특검팀의 수사에 협조한 이들이 없었다면 확인이 어려운 의혹이 산적했다. 이 중에는 정보사 공작 업무와 내란 당일 계엄군의 움직임을 알린 군인들이 있다. 대개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 간 판단이 다른 걸 두고 형평성에 어긋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2·3 내란에는 여러 수사기관이 뛰어들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국방부 내란 특수본, 내란 특별검사팀(특별검사 조은석), 2차 종합특검팀(특별검사 권창영) 등이다. 복수의 군인들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일부는 혐의가 있었다. 수사기관마다 판단이 달랐다는 게 핵심이다. 국방부 검찰단의 경우가 그렇다. 누군가의 공작이나 의도, 내란 당일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는 사례가 존재했다. 협조했는데 다른 판단 내란 특검팀과 검찰 특수본에 협조한 데 이어 재판에서 핵심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중 1명은 김창학 전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장(대령)이다. 김 전 단장은 지난 2월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법령준수의무위반 및 성실의문위반으로 파면됐다. 김 전 단장은 수사기관에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지시로 국회로 갔던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해 진술했다. 종합특검팀이 내란의 리허설이라고 판단한 국군방첩사령부 자유의 방패(FS) 훈련과 이 전 사령관의 이례적인 지시가 담긴 녹취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엔 내란 특검팀에 제출된 적 없는 자료도 포함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관련 녹취에는 방첩사의 전시 합동수사본부 훈련 과정에서 수방사 실무진들이 병력 지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 전 단장을 포함한 전·현직 수방사 관계자들은 “‘합수단 수사관들은 경호 대상이 아니다’ ‘합수단 경호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병력 지원 자체에 난색을 표했다”고 진술했다. 수방사 관계자들은 “전시 상황이라면 검토가 가능하지만 평시에 병력을 지원하려면 수방사 작전계획부터 변경해야 한다. 육군본부 군사경찰실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이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 전 사령관과 방첩사의 압력에 못 이긴 수방사는 당시 훈련에 군사경찰단 50명과 35특임대대 20~25명 등 70여 명 규모 병력을 지원했다.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한 종합특검팀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2024년 3월 전시나 계엄 시 부대별 임무와 병력 운용 등을 규정한 군 내부 계획 문서인 ‘전시 비문’ 개정을 추진하며 기존과 다른 방식의 합수본 운영을 준비한 것으로 의심했다. 이 전 사령관은 이 과정에서 수방사 병력 지원을 추진하며 실무진의 반대에도 병력 파견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두 사령관을 지난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모든 특검에 자료 넘겨 김 전 단장을 비롯한 복수의 군 관계자들은 현재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반대로 행위가 비슷했던 조성현 대령(전 수방사 제1경비단장)은 훈장을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지난달 말 조 대령을 조사한 후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조 대령은 합참 지휘통제2팀장 직을 수행하다 최근 인사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 대령이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51분 이 전 사령관과 통화하며 “그렇게 지금 임무를 줬고” “충성, 계속 작전하겠습니다”고 라고 언급한 녹취와 다음 날인 12월 4일 오전 1시2분 김 전 단장이 “(이진우) 사령관이 울타리를 넘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게 안 되잖아”라고 말하자 조 대령이 “우리는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경찰과 협조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답한 내용을 확인한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하고 국회 침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중간 실행자’ 역할을 했다고 결론 냈다. 김 전 단장이 기소된 점도 기소 근거로 꼽혔다.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조 대령은 예하 제2특임대대와 제35특임대대에 하달했다. 실제 35특임대대는 계엄 당시 국회 경내에 투입됐다. 종합특검팀의 판단은 내란 특검팀의 수사 결론과 배치된다. 내란 특검팀은 조 대령이 “상부의 위헌·위법적인 지시를 거부했다”며 그를 입건하지 않았다. 종합특검팀은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조 대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일부 군인들 특검에 핵심 진술·자료 제출하고 불기소 군검찰, 내란 중요임무 종사 재판 넘기고 대거 파면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같은 해 12월4일 새벽 1시4분 서강대교 북단에 도착한 제2특임대대 2지역대장 윤덕규 소령에게 총 세 가지를 지시했다고 봤다. ▲총기와 탄약을 차량에 두고 진압봉을 챙겨 서강대교를 넘어올 것 ▲진입 방법은 국회에 이미 들어가 있는 부대와 상의할 것 ▲임무는 국회 안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는 것 등이다. 조 대령은 “2지역대장에게 정확하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나요”라는 종합특검팀의 질문에 “윤덕규에게 2024년 12월4일 1시20분경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것이고, 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고 진술했다. 조성현 대령 측은 문자 그대로 “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시가 회군의 취지였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윤 소령은 “조 대령이 ‘너희가 (서강대교를) 넘어왔을 때 시민과 충돌하게 되면 크게 다친다. (서강대교 인근에) 대기하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끝까지 반대 김 전 단장과 동시에 파면된 핵심 증인 중 1명은 정성우 전 방첩사 1처장이다. 그는 지난해 6월24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여 전 사령관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전 처장은 검찰 특수본에서 진술했던 것처럼 “여인형 전 사령관이 당시 선관위 전산실을 통제하고 이후 민간 수사기관에 넘기며, 여의치 않으면 서버를 복사하거나 ‘떼어오라’는 3단계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정 전 처장을 비롯해 방첩사 법무실 간부들은 여 전 사령관의 지시에 대해 기술적·법률적 검토 결과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 전 사령관은 “제 기억으론 정성우 증인한테 서버를 복사해라, 떼오라고 이야기한 기억은 분명히 없다”며 “정성우에게 서버를 떼서 가져오는 방법이 있을까 정도를 문의했다면 모를까, 명시적으로 카피해라, 떼서 가져오라고 했을 것 같지 않다. 카피도 안 되는데 어떻게 떼서 가져오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정 전 처장은 내란 사태 당일부터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 총 6차례 통화했다.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50분 정 전 처장은 여 전 사령관으로부터 노 전 사령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전 사령관은 정 전 처장에게 “(병력이) 출발을 했느냐”라고 물었고 정 전 처장은 “이제 영외 거주자를 소집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내란 특검팀에 협조했던 정 전 처장은 김 전 단장처럼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 특수본은 정 전 처장이 방첩사 인원 115명을 4개 팀으로 긴급 편성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과천·관악 청사, 선관위 수원 연수원, 여론조사 꽃 등 4곳에 출동하게 하는 등 군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단장을 비롯해 복수의 군 간부들이 기소되자 내란 특검팀은 국방부 검찰단에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취지로 불만을 전했다고 한다. 군 일각에서는 정 전 처장은 아니더라도 김 전 단장과 소수의 영관급 장교들은 국방부 조사본부 차원에서 무혐의 종결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란 특검팀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김창학 대령 외에도 여러 사람이 협조했고 그들 덕분에 수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컸다”며 “군검찰의 기소에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되고 해당 기관의 판단이지만 복수의 군 관계자들을 기소했을 때 ‘왜 저 사람은 기소 안 하느냐’는 등의 뒷말이 상당했다. 특검팀도 관련 내용을 알았기에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음모·모해 명확한데 혐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가 아니지만 사실상 노 전 사령관과 여 전 사령관에게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박민우 전 정보사 A 여단장(예비역 준장)이다. 그는 2025년 초 국회 청문회에서 ‘노상원 수첩’에 관한 핵심 증언을 했던 인물로 주목받았다. 박 준장의 증언 후 실제 관심이 크지 않았던 노 전 사령관의 수첩의 신빙성과 중요도가 커졌다. 노 전 사령관은 정보사를 내란에 동원하려 사실상 박 준장을 축출했다. 여 전 사령관의 검찰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박 준장의 비위, 비밀은닉, 업체 로비 등 4~5건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노 전 사령관이 비위 제보를 하지 않았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는 군형법상 군사기밀누설 및 암호 부정사용,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갖는다. 당시 블랙 요원 명단 유출 사건도 방첩사가 초동수사해 사건을 군검찰로 넘겼다. 여 전 사령관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건 박 준장과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간 갈등 전후다. 박 준장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시기와도 일치한다. 박 준장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직도 고집이 세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말한 게 전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날 내란에 동원하려 일종의 간보기 차원으로 질문했던 것 같다. 노상원에 의해 직무에서 배제됐다고 본다. 여단장이 공석이 되자 이 자리 진급을 미끼로 김봉규, 정성욱을 노상원이 조종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상원 수첩 '핵심 증언자' 박민우, 사실상 노·여 모해로 좌천 신원식 “노상원·여인형에 의해 피해 본 것 맞다” 특검에 진술 문 전 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이 2024년 8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정보사 갈등’ 교통정리를 위한 후속 조치를 약속하고 경질될 예정이었다. 신 전 실장은 박 준장과 문 전 사령관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했지만 문 전 사령관이 거부했다. 문 전 사령관은 유임됐고 노 전 정보사령관과 대통령실 경호처장이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개입하면서 신 전 실장은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옷을 벗었다.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이에 관해 검찰 특수본 조사에서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2024년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진술했다. 박 준장의 주장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신 전 실장은 종합특검팀 조사에서 “박민우 장군은 여인형과 노상원에게 피해를 봤다. 문상호가 유임되지 않았으면 박 장군도 재판에 넘겨지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며 “큰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둘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얘기를 했던 거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