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역사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썼다. 교과서에 단골로 등장하는 이 문구는 과거사 연구가 ‘옛날이야기’를 기록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그 사건이 현대에 미친 영향과 평가를 동시에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과거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3기가 출범했고, 내년 70주기를 맞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을 총망라하는 진상 규명 보고서도 한창 작성 중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당시의 문제를 짚어낼 만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이 향상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활발해진
과거사 연구
여순사건 연구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박사 학위를 받은 김득중 여수·순천 10·19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이하 여순사건 위원회) 진상조사 보고서 작성 기획단(이하 보고서 작성단) 단장은 “사회의 민주화 진전 정도와 과거사 진상 규명은 밀접하게 관련돼있다. 과거 민주화가 되지 않은 시기에는 과거사에 관한 관심이 적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야가 밝아지고 넓어지면서 인권의 측면에서 옛날에 일어난 사건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고 설명했다.
여순사건은 정부 수립 초기 단계에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켰다는 내용이다. 1948년 10월19일부터 지리산 입산 금지가 해제된 1955년 4월1일까지 여수·순천 지역을 비롯해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당했다.
여순사건 위원회와 보고서 작성단은 2021년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출범했다. 김 단장은 지난해 11월 2기 보고서 작성단의 총 책임자로 발탁됐다. 그는 늦어도 내년 10월까지 여순사건 보고서를 완성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여순사건 보고서가 나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12일 서울 중구 여순사건 위원회 사무실에서 김 단장을 만났다. 김 단장을 비롯한 집필진은 보고서 작성을 위한 워크숍으로 사흘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는 “보고서의 서술 기조, 방향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회의다. 집필진이 각자 맡은 바 주제가 다른데, 서로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쓸 것인지를 논의하는 자리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빨갱이의 탄생> 1호 박사
부임 첫날 직원 3명 있어
김 단장은 여순사건 연구의 권위자다. 그가 여순사건으로 박사 논문을 쓴 이후 펴낸 저서 <빨갱이의 탄생>은 역사학계에 상당한 충격을 안겼다. 그는 “책 제목을 본 학계 관계자들이 ‘김득중은 교수를 포기했나’라고 말할 정도였다”며 웃었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읽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야기다.
1997~199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자료 대한민국사>라는 책을 펴내는 과정에서 김 단장은 전국의 중앙지와 지방지를 모두 봐야 하는 일에 투입됐다. 당시로부터 약 50년 전의 기사를 발췌해 일종의 사료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때 김 단장은 여순사건에 대해 처음 ‘제대로’ 인식했다고 말했다.
김 단장은 “1948년 10~11월 기사를 보고 이상한 점을 느꼈다. 당시 나는 여순사건을 여수, 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지적 사건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일단 사건 규모가 매우 컸고, 좌익이나 남로당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점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민간인이 정말 많이 죽었는데도 나를 비롯해 당시 현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그런 내용을 잘 모르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국의 통신사 AP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보도도 김 단장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보도는 6‧25 한국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민간인 피해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김 단장은 “AP의 노근리 사건 보도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나도 그 이후로 계속 공부해 박사 논문을 쓴 다음 <빨갱이의 탄생>이라는 책을 냈다”고 설명했다.
<빨갱이의 탄생>은 ‘빨갱이’라는 단어가 이데올로기나 사상적 배경에서 온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김 단장은 빨갱이를 그런 이념적 개념이 아닌 혐오와 배제의 논리가 응축된 단어라고 봤다.
민간 피해
학살 수준
김 단장은 “실제 수십 년간 사용된 빨갱이의 용례를 보면 내가 싫은 사람들, 내가 적대하는 사람들, 내가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붙이는 멸칭으로 사용됐다. 정부에 반대하는 야당 인사도 빨갱이라고 불렀다. 그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사상성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적대시하는 사람을 빨갱이로 지칭하고 짓누르는 반공 체제는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심지어 반공이 국시로까지 여겨졌다. 정계, 학계, 교육계, 언론계 등 한국 사회의 모든 시스템이 반공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동원됐다”고 강조했다.
그런 관점에서 여순사건은 ‘빨갱이’로 대표되는 반공 체제의 기원이 된다는 게 김 단장의 생각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반공 사회로 만든 결정적인 사건으로 한국 전쟁을 꼽는데, 나는 그보다 2년 전에 일어난 여순사건이 그 좌표를 찍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80~1990년대까지 50년 이상 한국 사회가 반공을 제1의 가치로 두고 삶을 영위해온 배경에 여순사건이 있다는 것이다. 김 단장에게 여순사건 보고서 작성 업무가 남다르게 여겨지는 이유다. 그는 “역사라는 게 굉장히 방대하고 다양한 사건과 연계돼 있지 않나. 그래서 방계로 이것저것 공부를 많이 했다”며 웃었다.
이어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공부가 여순사건 보고서를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인생의 과업,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정부의 지원이 아쉬운 점도 있다고 피력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출범한 1기 보고서 작성단이 여순사건에 대한 전문성 부족, 유족‧시민단체와의 갈등으로 1년 반 만에 해체 수순을 밟은 뒤 김 단장이 2기 단장으로 뽑혔을 때만 해도 기대가 상당했다. 한 연구자는 “이제야 딱 맞는 사람이 단장 자리에 앉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기 파행
“적합자”
하지만 부임과 동시에 김 단장이 마주한 건 열악한 작성단 상황과 1기 보고서 작성단이 남겨 놓은 허술한 기록뿐이었다. 그는 “딱 출근했는데 보고서 작성과 관련한 직원이 3명밖에 없었다. 그 직원들에게 1기 때 뭘 했냐고 물었더니 주로 연구 용역 발주, 관리 일을 했다고 하더라. 보고서 관련 작업을 한 건 없냐고 했더니 ‘가목차’ 하나를 건네줬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김 단장은 청와대, 국회, 정부 등을 쫓아다니며 인력과 예산을 요구했다. 그가 요구한 인력은 15명. 당연직 등으로 분류된 인원이 아닌 보고서 작성을 위해서만 15명이 필요하다는 게 김 단장의 생각이었다. 그는 “제주 4‧3 사건 보고서 작성 당시 집필 인원이 그 정도 된다. 여순사건은 발생 범위와 규모가 제주 4‧3 사건보다 넓고 큰 편이라 3명으로는 도저히 쓸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토로했다.
발 벗고 뛰었지만 현재까지 확보한 인원은 5명으로, 김 단장까지 포함하면 집필진은 6명이 전부다. 김 단장은 “이제는 집필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기다. 인력과 예산 투입이 돼도 그걸 활용하기 어렵다. 집필진이 어떤 주제로 글을 쓸지 배분이 이뤄졌고 자료 수집도 마무리 단계다. 정부가 조금 더 빨리 지원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청와대, 정부, 국회 모두 보고서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린다. 언제 보고서가 완성되는지 자주 묻는다. 하지만 보고서가 완성되려면 어느 정도의 인력과 예산이 필요하고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지원이 부족하다. 여순사건을 포함해 과거사에 대한 논의가 이재명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돼 있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아쉬운 건 사실”이라고 전했다.
“반공 체제의 기원이 된 사건”
“과거 기록 넘어 현대에 도움”
그럼에도 김 단장은 정말 ‘완성된’ 보고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몇십 년 동안 숨죽여야 했던, 현대사에서 지워지다시피 한 여순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은 이제 유족이나 시민단체, 혹은 지역을 넘어 사회적 요구가 됐다고 강조했다. 또 여순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위치도 간과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 단장은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예로 들면 과연 그 사건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인지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직접적으로 그 과정을 겪은 건 광주, 전남 지역이었지만 5‧18은 한국 사회에 현재까지 아주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0년대 군부 독재, 1987년 6월 항쟁, 지역 갈등 등 사회에 나타난 여러 가지 현상의 배경에 5‧18이 있다. 역사적으로 계기가 큰 사건은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말했다.
이어 “여순사건도 그런 맥락에서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여순사건 보고서가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록을 넘어 가치 평가, 해석 등의 작업을 거쳐 현대에 무언가를 남길 수 있도록 작성돼야 하는 이유다. 그걸 하지 못하면 그저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여기에 옛날이야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다”라고 힘줘 말했다.
그러면서 김 단장은 “빨갱이라는 용어에 함축된 배제와 혐오의 논리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올바른 사회는 서로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그게 역사를 만든다. 한국 사회는 그 차이를 확인한 뒤 그 한쪽의 절멸을 의도했다. 그리고 실제로 실행했다. 이게 한국 사회에서 빨갱이를 대하는 태도였다”고 전했다.
혐오와 배제
고리 끊어야
또 “이런 식의 논리를 가진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 혐오와 배제가 극단으로 가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 게 여순사건이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고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상태로 가는데, 국가는 그걸 애국이라고 포장해 줬다. 이 과정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됐다. 이 고리를 끊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