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만에 다시?’ 친일재산조사위 돌아온 진짜 이유

쫓다 말았는데 또 쫓는다고?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16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기 조사위는 수천 필지의 친일 재산을 찾아 국가로 돌렸지만, 이미 팔리거나 상속된 재산까지 모두 환수하지는 못했다. 재산은 수십년 동안 팔리고, 상속되고,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끝내 남겨진 친일 재산을 다시 추적하기 위해 국가가 두 번째로 나선다.

오는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가 출범한다. 지난 2010년 1기 조사위가 활동을 종료한 지 무려 16년 만이다. 정부가 다시 조사위를 띄우는 이유는 지난 1기 조사에서 친일 재산 환수 작업을 모두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재산을 찾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지만, 조사에 착수했을 때는 이미 광복 이후 수십 년이 흐른 상태였다.

흩어진 재산들
60년 늦은 추적

재산 상당 부분이 매각되거나 후손에게 상속됐고, 제3자에게 넘어간 경우도 많았다. 문제는 1기 조사위가 사라진 이후였다. 조사위 활동 종료를 전후로 친일 재산의 국가 귀속 실적은 급격하게 줄었다. 국회가 제시한 친일 귀속 재산 수탁 현황을 보면 2009년 719필지, 2010년 663필지였던 수탁 재산은 2011년 3필지로 급감했다. 2012년과 2013년에는 한 필지도 없었으며, 2024년에도 1필지에 그쳤다.

그사이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이 관련 재산을 제3자에게 매각해 현금화하거나 소유권을 여러 명에게 분산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재산의 흐름을 추적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재출범을 추진한 배경이다.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국회는 지난 5월 친일 재산 환수를 위한 새로운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법은 지난 6월2일 공포됐다. 정부도 법 제정과 함께 16년 만의 조사위 재설치를 공식화했다. 조사위는 2005년 12월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한다.

법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고 민족을 탄압한 반민족 행위자가 친일 행위로 축적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선의의 제3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조사위는 대통령 소속의 독립적인 국가기구로 위원장과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한 위원 9명으로 구성됐다. 실제 조사 업무를 위해 법무부와 경찰청, 재정경제부, 산림청, 국세청 등 관계기관에서 파견된 공무원과 별정·계약직 공무원까지 합쳐 모두 104명 규모의 조직이 꾸려졌다.

조사 대상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과 이를 상속받은 재산, 친일 재산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유증이나 증여받은 재산을 친일 재산으로 규정했다.

특히 이 기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취득한 재산은 원칙적으로 친일 행위의 대가로 얻은 것으로 추정하도록 했다. 실제 조사에서는 현재의 등기부만 확인해서는 친일 재산 여부를 가려내기 어려웠다.

수십년에 걸친 소유권 변동을 역으로 추적해야 했기 때문이다. 친일 재산 문제가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것은 광복 이후 60년이 지나서였다.

이완용 1573만㎡ 필지 중 되찾은 토지는 1만928㎡
대대적 환수 작업에도 매각·상속·소송에 ‘미완’

광복 직후인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반민특위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친일 인사에 대한 처벌과 재산 문제 역시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 이후에는 친일 행위로 형성된 재산을 국가가 환수할 별도의 법적 근거도 마련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친일 인사들이 보유했던 재산은 자연스럽게 후손들에게 상속됐다. 문제는 1980년대 말부터 일부 후손들이 국가나 제3자 명의로 넘어간 토지를 돌려달라며 이른바 ‘조상 땅 찾기’ 소송에 나서면서 불거졌다.

당시에는 해당 토지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얻은 재산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국가가 소유권을 주장할 명확한 법적 근거가 없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완용 후손의 토지 반환 소송이었다. 이완용의 증손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일대 토지 등을 놓고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고, 1997년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당시에는 친일 행위로 얻은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킬 특별법이 마련되기 전이었고, 후손은 결국 토지를 되찾았다. 해당 토지는 약 2372㎡, 당시 시가 약 30억원 상당으로, 이후 매각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완용 후손의 승소 이후 소송이 잇따랐다.

송병준 후손의 재산 반환 소송은 규모부터 달랐다. 그의 증손자는 2002년 인천 부평구 산곡동 일대 부평 미군기지, 이른바 캠프마켓 부지 가운데 약 36만5000㎡를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공시지가만 약 2500억원에 달하는 땅으로, 미군기지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을 차지했다.

후손 측은 국가가 소유권의 근거로 제시한 옛 토지대장과 임야대장이 위조됐거나 나중에 허위로 작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3년여간의 심리 끝에 2005년 1심에서 후손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항소심에서도 패소했고, 대법원은 2011년 상고를 기각하면서 국가 소유가 최종적으로 유지됐다.

이 같은 이유로 국회에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화됐다. 핵심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얻은 재산을 특정해 국가로 돌려놓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정상적인 거래를 통해 재산을 취득한 제3자의 권리는 보호하도록 했다.

찾아놓고도
못 가져왔다

이 같은 논의를 거쳐 2005년 12월29일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법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친일 행위로 축재한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켜 정의를 구현하고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명시했다. 친일 재산을 국가가 되찾을 수 있는 법적 틀이 광복 60년 만에 마련된 셈이다.

법이 만들어지면서 실제 재산을 찾아낼 조직도 필요해졌다. 이에 특별법을 근거로 2006년 7월13일 1기 조사위가 공식 출범했다. 수십년 동안 후손에게 상속되고 여러 차례 거래되면서 흩어진 친일 재산을 국가가 직접 추적하는 작업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사위가 4년 동안 들여다본 범위는 상당했다.

당시 조사 대상에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는 462명, 이들의 후손은 3만884명에 달했다. 전국에 흩어진 토지와 과거 소유 기록을 확인한 끝에 이 가운데 168명이 보유하거나 후손에게 넘어간 친일 재산 2359필지, 1113만9645㎡를 국가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공시지가로 약 959억원, 시가로는 약 2106억원에 달하는 규모였다. 여기에 이미 제3자에게 넘어가 바로 국가에 귀속시킬 수는 없었지만 친일 재산으로 확인한 116필지, 192만9758㎡가 추가된다. 이를 합하면 조사위가 친일 재산으로 찾아낸 토지는 모두 2475필지, 1306만9403㎡에 이른다.

조사위가 친일 재산임을 확인하면 국가가 이후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의 방식으로 재산이나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되찾는 절차를 밟았다. 조사위 활동 종료를 앞둔 2010년 7월까지 이 같은 소송을 통해 돌려받은 금액만 약 13억원이었다.

환수 규모를 당시 시가로 환산하면 국가 귀속 결정과 제3자 처분 재산 등을 포함해 약 2373억원에 달했다. 수십년 동안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친일 재산을 처음으로 국가가 대규모로 찾아내고 귀속 절차에 들어갔다는 점에서는 의미 있는 성과였다.

하지만 조사 대상 462명 가운데 실제 재산 환수나 친일 재산 확인으로 이어진 사람은 168명에 그쳤다. 단순 계산하면 전체 조사 대상의 약 36% 수준이다. 광복 이후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관련 자료가 사라지고 재산이 여러 차례 매매·상속된 점 등이 조사 과정의 한계로 지적됐다.

조상 땅 찾기
줄줄이 소송

일부 수십만㎡에 달하는 토지는 국가로 넘어간 반면, 일제강점기 막대한 토지를 보유했던 것으로 확인된 인물을 대상으로 조사위가 실제 찾아낸 재산은 극히 일부에 그쳤다.

이 같은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인물이 이완용과 송병준이다. 두 사람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친일 인사인 동시에 전국에 막대한 토지를 보유한 대지주였다. 그러나 조사위가 실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린 재산은 과거 보유 규모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조사위가 2010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이완용은 일제강점기 1309필지, 약 1573만㎡의 토지를 소유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조사위 내부 보고서에서는 멸실된 토지대장 대신 지적 원도와 각종 사료까지 추가로 대조한 결과 이완용의 실제 보유 부동산이 1801필지, 2233만4954㎡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여의도 면적의 7배가 넘는 규모다. 하지만 조사위가 이완용 재산으로 국가 귀속 결정을 내린 토지는 16필지, 1만928㎡에 불과했다. 공시지가 기준 약 7000만원 규모로, 내부 보고서에서 확인된 전체 부동산 면적을 기준으로 하면 약 0.05%에 그친다. 막대한 토지를 확인하고도 실제 국가가 되찾을 수 있었던 재산은 극히 일부였던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완용이 생전에 이미 상당수 토지를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조사위 자료를 토대로 한 분석에 따르면 이완용은 토지를 취득한 뒤 장기간 보유하기보다 수년 안에 되파는 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특히 전북지역 토지를 대거 확보한 뒤 일본인 지주들이 진출해 땅값이 오르면 다시 매각했고, 이런 식으로 보유 토지의 98~99%가 광복 이전에 처분된 것으로 조사됐다. 부동산을 팔아 확보한 돈의 흐름은 더욱 찾기 어려웠다.

조사위는 각종 사료를 토대로 1920년대 초 이완용이 보유했던 현금과 은행예금만 약 300만원에 달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토지는 등기나 토지대장에라도 남지만 현금은 수십년 동안 상속·소비되거나 다른 자산으로 바뀌면 원래 친일 재산과의 연결고리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광복 이후까지 이완용 일가 명의로 남아 있던 땅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와 경기 용인, 충남 아산, 전북 익산 등에서 광복 이후에도 이완용 일가가 보유했던 것으로 확인된 토지만 16만6182㎡에 달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상당수 역시 1950~1970년대를 거치며 제3자에게 넘어간 것으로 파악됐다.

이미 팔린 친일 재산 ‘처분 대가’까지 추적
최소 325억 추가 환수 전망…최대 5년간 조사

송병준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사위가 2010년 공개한 자료에서는 그가 일제강점기 570필지, 약 857만㎡의 토지를 보유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후 조사위 내부 자료를 추가로 분석한 결과에서는 실제 보유 부동산이 약 1004만㎡까지 확인됐다.

여기에 일본 홋카이도에서도 약 1850만㎡의 토지를 일제로부터 받았다는 기록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병준의 재산 가운데 국가 귀속 결정이 내려진 것은 9필지, 2911㎡에 그쳤다. 공시지가로 약 4700만원 수준이었다. 송병준 역시 1930년대까지 국내에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 상당수를 처분한 것으로 조사됐다.

광복 이후 송병준 일가 명의로 남아 있던 토지 6만7081㎡가 추가로 확인됐지만, 이 역시 1953년부터 1971년 사이 차례로 제3자에게 매각됐다.

이해승은 대한제국 황실 종친 출신으로, 한일병합 이후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조사위는 2007년 후손이 상속받은 경기도 포천 일대 토지 192필지, 당시 시가 300억원대 재산을 친일 재산으로 판단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후손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당시 특별법의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자’라는 문구가 쟁점이 됐고, 2010년 대법원은 후손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국회가 해당 요건을 삭제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했지만, 이미 확정 판결이 난 재산까지 다시 환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민영휘는 대한제국 고위 관료를 지낸 뒤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대표적 친일 인사다. 조사위는 2007년 민영휘 소유 재산 31만여㎡, 당시 시가 약 57억원 상당을 국가 귀속 대상으로 결정했고 청주 상당산성 일대 토지도 실제 국가로 넘어갔다. 후손들은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조사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럼에도 2024년 청주와 춘천에서 민영휘 후손 소유 토지 22필지, 21만여㎡가 다시 친일 재산으로 지목돼 국가 귀속 신청이 이뤄졌다. 조사위가 한 차례 대규모 환수에 나섰음에도 관련 재산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던 셈이다.

현재 친일 재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보다 여러 차례 매매와 상속을 거치거나 현금으로 바뀐 경우가 늘어나면서 환수 작업의 난도 역시 1기 때보다 높아졌다. 2기 조사위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해 모두 9명으로 구성되며, 기본 3년에 한 차례 2년을 연장해 최대 5년간 활동할 수 있다.

친일 재산
숨바꼭질

특히 1기와 달리 친일 재산이 이미 매각된 경우에도 그 처분 대가까지 추적해 환수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혔다. 정부가 기대하는 추가 환수 규모도 상당하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2기 조사위가 가동되면 “최소 325억원 이상의 친일 재산을 추가로 환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환수된 재산은 순국선열·애국지사 사업 기금 등에 우선 활용될 예정이다. 16년 만에 다시 시작되는 조사에서 과거 미처 찾지 못했거나 이미 처분된 친일 재산의 흐름을 어디까지 되짚어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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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종합특검팀이 종료됐다. 12·3 내란과 관련된 수사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은 경찰 국수본으로 이첩됐다. 검찰 특수본과 특검팀의 수사에 협조한 이들이 없었다면 확인이 어려운 의혹이 산적했다. 이 중에는 정보사 공작 업무와 내란 당일 계엄군의 움직임을 알린 군인들이 있다. 대개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 간 판단이 다른 걸 두고 형평성에 어긋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2·3 내란에는 여러 수사기관이 뛰어들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국방부 내란 특수본, 내란 특별검사팀(특별검사 조은석), 2차 종합특검팀(특별검사 권창영) 등이다. 복수의 군인들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일부는 혐의가 있었다. 수사기관마다 판단이 달랐다는 게 핵심이다. 국방부 검찰단의 경우가 그렇다. 누군가의 공작이나 의도, 내란 당일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는 사례가 존재했다. 협조했는데 다른 판단 내란 특검팀과 검찰 특수본에 협조한 데 이어 재판에서 핵심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중 1명은 김창학 전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장(대령)이다. 김 전 단장은 지난 2월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법령준수의무위반 및 성실의문위반으로 파면됐다. 김 전 단장은 수사기관에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지시로 국회로 갔던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해 진술했다. 종합특검팀이 내란의 리허설이라고 판단한 국군방첩사령부 자유의 방패(FS) 훈련과 이 전 사령관의 이례적인 지시가 담긴 녹취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엔 내란 특검팀에 제출된 적 없는 자료도 포함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관련 녹취에는 방첩사의 전시 합동수사본부 훈련 과정에서 수방사 실무진들이 병력 지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 전 단장을 포함한 전·현직 수방사 관계자들은 “‘합수단 수사관들은 경호 대상이 아니다’ ‘합수단 경호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병력 지원 자체에 난색을 표했다”고 진술했다. 수방사 관계자들은 “전시 상황이라면 검토가 가능하지만 평시에 병력을 지원하려면 수방사 작전계획부터 변경해야 한다. 육군본부 군사경찰실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이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 전 사령관과 방첩사의 압력에 못 이긴 수방사는 당시 훈련에 군사경찰단 50명과 35특임대대 20~25명 등 70여 명 규모 병력을 지원했다.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한 종합특검팀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2024년 3월 전시나 계엄 시 부대별 임무와 병력 운용 등을 규정한 군 내부 계획 문서인 ‘전시 비문’ 개정을 추진하며 기존과 다른 방식의 합수본 운영을 준비한 것으로 의심했다. 이 전 사령관은 이 과정에서 수방사 병력 지원을 추진하며 실무진의 반대에도 병력 파견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두 사령관을 지난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모든 특검에 자료 넘겨 김 전 단장을 비롯한 복수의 군 관계자들은 현재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반대로 행위가 비슷했던 조성현 대령(전 수방사 제1경비단장)은 훈장을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지난달 말 조 대령을 조사한 후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조 대령은 합참 지휘통제2팀장 직을 수행하다 최근 인사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 대령이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51분 이 전 사령관과 통화하며 “그렇게 지금 임무를 줬고” “충성, 계속 작전하겠습니다”고 라고 언급한 녹취와 다음 날인 12월 4일 오전 1시2분 김 전 단장이 “(이진우) 사령관이 울타리를 넘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게 안 되잖아”라고 말하자 조 대령이 “우리는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경찰과 협조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답한 내용을 확인한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하고 국회 침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중간 실행자’ 역할을 했다고 결론 냈다. 김 전 단장이 기소된 점도 기소 근거로 꼽혔다.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조 대령은 예하 제2특임대대와 제35특임대대에 하달했다. 실제 35특임대대는 계엄 당시 국회 경내에 투입됐다. 종합특검팀의 판단은 내란 특검팀의 수사 결론과 배치된다. 내란 특검팀은 조 대령이 “상부의 위헌·위법적인 지시를 거부했다”며 그를 입건하지 않았다. 종합특검팀은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조 대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일부 군인들 특검에 핵심 진술·자료 제출하고 불기소 군검찰, 내란 중요임무 종사 재판 넘기고 대거 파면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같은 해 12월4일 새벽 1시4분 서강대교 북단에 도착한 제2특임대대 2지역대장 윤덕규 소령에게 총 세 가지를 지시했다고 봤다. ▲총기와 탄약을 차량에 두고 진압봉을 챙겨 서강대교를 넘어올 것 ▲진입 방법은 국회에 이미 들어가 있는 부대와 상의할 것 ▲임무는 국회 안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는 것 등이다. 조 대령은 “2지역대장에게 정확하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나요”라는 종합특검팀의 질문에 “윤덕규에게 2024년 12월4일 1시20분경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것이고, 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고 진술했다. 조성현 대령 측은 문자 그대로 “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시가 회군의 취지였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윤 소령은 “조 대령이 ‘너희가 (서강대교를) 넘어왔을 때 시민과 충돌하게 되면 크게 다친다. (서강대교 인근에) 대기하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끝까지 반대 김 전 단장과 동시에 파면된 핵심 증인 중 1명은 정성우 전 방첩사 1처장이다. 그는 지난해 6월24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여 전 사령관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전 처장은 검찰 특수본에서 진술했던 것처럼 “여인형 전 사령관이 당시 선관위 전산실을 통제하고 이후 민간 수사기관에 넘기며, 여의치 않으면 서버를 복사하거나 ‘떼어오라’는 3단계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정 전 처장을 비롯해 방첩사 법무실 간부들은 여 전 사령관의 지시에 대해 기술적·법률적 검토 결과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 전 사령관은 “제 기억으론 정성우 증인한테 서버를 복사해라, 떼오라고 이야기한 기억은 분명히 없다”며 “정성우에게 서버를 떼서 가져오는 방법이 있을까 정도를 문의했다면 모를까, 명시적으로 카피해라, 떼서 가져오라고 했을 것 같지 않다. 카피도 안 되는데 어떻게 떼서 가져오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정 전 처장은 내란 사태 당일부터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 총 6차례 통화했다.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50분 정 전 처장은 여 전 사령관으로부터 노 전 사령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전 사령관은 정 전 처장에게 “(병력이) 출발을 했느냐”라고 물었고 정 전 처장은 “이제 영외 거주자를 소집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내란 특검팀에 협조했던 정 전 처장은 김 전 단장처럼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 특수본은 정 전 처장이 방첩사 인원 115명을 4개 팀으로 긴급 편성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과천·관악 청사, 선관위 수원 연수원, 여론조사 꽃 등 4곳에 출동하게 하는 등 군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단장을 비롯해 복수의 군 간부들이 기소되자 내란 특검팀은 국방부 검찰단에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취지로 불만을 전했다고 한다. 군 일각에서는 정 전 처장은 아니더라도 김 전 단장과 소수의 영관급 장교들은 국방부 조사본부 차원에서 무혐의 종결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란 특검팀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김창학 대령 외에도 여러 사람이 협조했고 그들 덕분에 수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컸다”며 “군검찰의 기소에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되고 해당 기관의 판단이지만 복수의 군 관계자들을 기소했을 때 ‘왜 저 사람은 기소 안 하느냐’는 등의 뒷말이 상당했다. 특검팀도 관련 내용을 알았기에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음모·모해 명확한데 혐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가 아니지만 사실상 노 전 사령관과 여 전 사령관에게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박민우 전 정보사 A 여단장(예비역 준장)이다. 그는 2025년 초 국회 청문회에서 ‘노상원 수첩’에 관한 핵심 증언을 했던 인물로 주목받았다. 박 준장의 증언 후 실제 관심이 크지 않았던 노 전 사령관의 수첩의 신빙성과 중요도가 커졌다. 노 전 사령관은 정보사를 내란에 동원하려 사실상 박 준장을 축출했다. 여 전 사령관의 검찰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박 준장의 비위, 비밀은닉, 업체 로비 등 4~5건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노 전 사령관이 비위 제보를 하지 않았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는 군형법상 군사기밀누설 및 암호 부정사용,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갖는다. 당시 블랙 요원 명단 유출 사건도 방첩사가 초동수사해 사건을 군검찰로 넘겼다. 여 전 사령관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건 박 준장과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간 갈등 전후다. 박 준장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시기와도 일치한다. 박 준장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직도 고집이 세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말한 게 전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날 내란에 동원하려 일종의 간보기 차원으로 질문했던 것 같다. 노상원에 의해 직무에서 배제됐다고 본다. 여단장이 공석이 되자 이 자리 진급을 미끼로 김봉규, 정성욱을 노상원이 조종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상원 수첩 '핵심 증언자' 박민우, 사실상 노·여 모해로 좌천 신원식 “노상원·여인형에 의해 피해 본 것 맞다” 특검에 진술 문 전 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이 2024년 8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정보사 갈등’ 교통정리를 위한 후속 조치를 약속하고 경질될 예정이었다. 신 전 실장은 박 준장과 문 전 사령관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했지만 문 전 사령관이 거부했다. 문 전 사령관은 유임됐고 노 전 정보사령관과 대통령실 경호처장이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개입하면서 신 전 실장은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옷을 벗었다.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이에 관해 검찰 특수본 조사에서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2024년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진술했다. 박 준장의 주장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신 전 실장은 종합특검팀 조사에서 “박민우 장군은 여인형과 노상원에게 피해를 봤다. 문상호가 유임되지 않았으면 박 장군도 재판에 넘겨지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며 “큰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둘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얘기를 했던 거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