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4대 의사 집안’ 역풍 맞은 하영

자랑질 가문에 발목 잡혔다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자랑이 예상치 못한 역풍으로 돌아왔다. 배우 하영이 방송에서 꺼낸 가족사를 계기로 증조부 안상호의 일제강점기 행적이 재조명되면서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소속사의 해명 번복과 하영의 자필 사과에도 광고·방송계의 거리두기가 이어지는 등 후폭풍은 계속되고 있다.

논란의 시작은 지난 7일 방송된 KBS2 <옥탑방의 문제아들>이었다. 넷플릭스 시리즈 <이런 엿같은 사랑> 홍보를 위해 배우 정해인과 함께 출연한 하영은 이날 자신의 가족사를 소개하던 중 ‘4대째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다.

쏟아지는
과거 기록

이날 하영은 증조부부터 조부, 부친, 친언니까지 의료계에 몸담았다고 말했다. 특히 증조부에 대해서는 “양의학을 일본에 가서 배워오시고 한양에 개원하신 첫 의사셨다”고 소개했다. 고종을 진료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꺼냈다. 방송 직후 온라인에서는 하영이 언급한 증조부가 누구인지를 두고 관심이 이어졌다.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뒤 서울에서 진료 활동을 했고 왕실 진료에도 참여했다는 이력을 토대로 한 인물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영의 본명이 안하영이라는 점과 그가 방송에서 언급한 이력이 맞아떨어지면서 안상호가 증조부라는 추측이 퍼졌다.

온라인에서는 그의 의료인으로서의 이력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시 남겨진 기록들이 함께 공유되기 시작했다. 친일 성격의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자료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과거 인터뷰까지 하나둘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영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일본에서 양의학을 배워온 의사’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방송에서 언급한 하영의 증조부 안상호는 1872년 태어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의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서양의학이 국내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전 일본으로 건너가 의학을 공부했고, 1902년 동경자혜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안상호는 이후 일본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한 뒤 귀국했다. 당시만 해도 서양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조선인 의사가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귀국 후에는 서울 종로 일대에 개인 진료소를 마련해 의료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실과의 인연도 있었다. 안상호는 왕실 의료에 참여하면서 고종과 순종 등의 진료를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기록에서는 의친왕이 일본에 머물 당시 곁에서 진료를 맡았던 인물로도 소개됐다.

주목할 점은 1918년 12월10일 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다. ‘완전히 내지화한 의사 안상호씨의 가정’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안상호와 일본인 아내, 자녀들의 생활상이 비교적 자세히 담겨있었다.

당시 일제가 조선인에게 일본식 생활과 동화를 강조하던 상황에서 안상호 가족을 하나의 사례로 소개한 기사였다. 내용도 구체적이었다. 기사에서 안상호는 자신을 두고 “나는 일본 사람과 똑같다”고 말했다. 조선 옷은 한 벌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음식 역시 매운 것은 먹지 않는다며 일본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종 진료한 첫 양의사” 증조부 친일 행적 파묘
이토 히로부미 추모 준비위·내선융화까지 재조명

조선인들과의 교류를 묻는 질문에는 “조선 사람과 그리 상종하는 일이 없으므로 불편한 것은 없다”는 취지의 더 노골적인 답변을 내놨다. 일본인인 부인 역시 오랫동안 조선에서 생활했지만 조선말을 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녀들 역시 자연스럽게 조선말보다 일본어에 익숙한 생활을 했다.

안상호의 이름은 친일 성격의 단체에서도 확인됐다. 1916년 결성된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대정친목회는 조선인 유력 인사들이 참여해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인정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내세웠던 단체로 평가된다.

‘을사오적’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인사들도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이라는 이름부터 당시 일본의 다이쇼 천황 연호에서 따온 것이었다. 관련 연구에서는 이 단체가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인정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융화를 뜻하는 이른바 ‘내선융화’를 내세웠던 것으로 설명한다.

이후 안상호의 다른 행적을 보여주는 기록도 잇따라 거론됐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안상호가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경성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추모대회 준비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고 밝혔다.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구 성격을 띤 경성부협의회와 내선융화를 내세운 동민회에서 활동했다는 설명도 나왔다. 대정친목회 한 곳에 이름을 올린 것이 전부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여러 기록에서 안상호의 이름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상호와 이완용 사이의 또 다른 인연도 재조명됐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고 박영석 전 건국대 교수의 논문 <이완용 연구>에 따르면 이재명 의사는 1909년 12월 서울 명동성당에서 행사를 마치고 나오던 이완용을 흉기로 공격했다.

중상을 입은 이완용은 병원으로 옮겨졌고, 논문에는 당시 의료진과 박종환·안상호 등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완용은 이듬해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앞장섰고, 이재명 의사는 같은 해 사형을 선고받아 2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고종과 관련된 기록도 논란 과정에서 다시 소환됐다.

안상호는 고종이 쓰러졌을 당시 일본인 의사들과 함께 진료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과거 고종 독살설과 연결하는 주장까지 등장했지만, 역사학계에서는 고종 독살설 자체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됐다.

이 같은 기록이 밝혀지면서 안상호의 친일 여부를 둘러싼 논쟁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안상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도,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이름이 없었다.

안상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곧바로 또 다른 논쟁으로 이어졌다. 친일 성격의 단체에서 활동한 기록과 조선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발언이 남아 있는데도, 왜 공식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대대로 의사
금수저 가문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친일인명사전> 미등재가 곧 친일 행적이 없다는 뜻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친일인명사전> 집필에 참여한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안상호에 대해 “친일 행적은 팩트”라며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방 사무처장에 따르면 <친일인명사전>은 단순히 친일 성격의 단체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인물을 수록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1차 사료를 토대로 친일 행위가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같은 행위를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했는지 등을 종합해 판단한다.

안상호의 경우 친일 행적으로 볼 수 있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당시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비교하면 적극성과 반복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수록 기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게 방 사무처장의 설명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관련 행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정부가 과거 확정한 공식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안상호의 이름은 없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를 조사해 확정한 명단에서 안상호는 제외됐다.  안상호를 ‘친일파’라고 단정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반론도 제기됐다.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하영을 둘러싼 비판을 ‘친일 강박증’이라고 표현했다. 안상호가 근대 서양의학을 익혀 의료계에서 활동했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하며,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 지도층의 행적을 현재의 기준으로 모두 같은 무게의 친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하영의 소속사 비스터스엔터테인먼트는 지난 10일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안상호가 하영의 증조부라는 사실은 맞지만, 온라인에서 제기되고 있는 친일 행적 의혹은 “사실무근”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해명 직후 상황은 오히려 더 악화됐다.

이미 공개된 자료 가운데 안상호가 1916년 대정친목회 평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기록이 확인됐고, 이를 뒷받침하는 학술자료와 당시 신문 기사들도 잇따라 공유됐다. 소속사가 어떤 근거로 의혹 전체를 사실무근이라고 판단했는지를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결국 소속사는 하루 만에 기존 입장을 뒤집었다. 지난 11일 공식 입장을 통해 “추가 확인 결과 증조부 안상호 선생이 1916년 대정친목회의 평의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는 기록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충분한 검증 없이 ‘사실무근’이라 성급히 답변해 혼란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초동 대응 과정에서 사실관계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뒤늦은 사과
더 커진 불씨

소속사는 하영이 방송에서 가족사를 언급하게 된 과정도 설명했다.

최근 방송 프로그램에서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집안의 ‘4대 의료 가업’ 이력을 이야기한 것이며, 이로 인해 의도치 않게 논란이 빚어진 데 대해 하영 역시 무거운 마음을 갖고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역사적 사실과 한 인물의 이력을 대중에 전하는 일에 얼마나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지 이번 일을 통해 깊이 깨달았다”며 앞으로 더욱 신중하고 겸허한 자세로 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차례 강하게 부인했던 입장을 불과 하루 만에 번복하면서 비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관련 기록이 공개적으로 확인 가능한 상황에서 충분한 검증도 없이 ‘사실무근’부터 내세웠다는 점이 도마 위에 올랐다. 공식 입장문에서 안상호를 ‘선생’이라고 표현한 부분도 문제됐다.

하영의 부친도 가족을 대표해 입장을 내놨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가족들이 안상호를 의친왕을 가까이에서 진료하고 보필했던 인물로 알고 있었다며, 증조부의 과거 행적이 이 같은 논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가족 전체가 이번 일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앞으로 역사를 다시 공부하고, 후손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고민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다만 이 과정에서도 또 다른 논란이 불거졌다. 부친이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을 설명하며 ‘한일합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해당 표현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사용돼 온 용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이 다시 이어졌다. 소속사의 입장 번복과 부친의 해명까지 이어졌지만 정작 하영 자신의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까지 하영 본인이 직접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도 비판 대상이 됐다.

가족사를 직접 언급한 당사자인 만큼 소속사 뒤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설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이다.

대정친목회·매일신보 나오자 입장 번복
“가족 자랑처럼 꺼냈다” 결국 고개 숙여

하영은 결국 지난 12일 자신의 SNS에 자필 편지를 올리고 직접 사과에 나섰다. 증조부 안상호의 친일 행적 논란이 불거진 지 사흘 만이었다. 하영은 먼저 “저의 증조부와 관련된 일들로 큰 실망과 상처를 안겨드린 점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입을 열었다.

이어 최근 증조부의 과거 행적을 접한 뒤 가족의 역사를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증조부의 모습도 털어놨다. 가족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 증조부의 삶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여러 자리에서 증조부 이야기를 가족의 자랑처럼 꺼내왔다고 인정했다.

논란이 불거진 뒤에는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봤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증조부의 친일적 행적을 알게 됐고,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족사를 가볍게 언급한 점을 반성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족의 역사와 당시 시대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역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더욱 신중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영은 “우리 역사를 깊이 있게 공부하고 광복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힘쓴 이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겠다”며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사과문이 공개되자 비판은 다시 꼬리를 물었다. 특히 증조부 안상호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면서 최근 함께 논란이 된 조부 안부호의 소록도병원 근무 이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로 거론됐다. 하영의 조부 안부호는 과거 국립소록도병원에서 근무했다.

당시 소록도에서는 한센인을 대상으로 강제 격리와 단종, 가족 분리 등 각종 인권침해가 이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대로 하영을 향한 비판이 선을 넘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조상의 행적을 이유로 후손에게 책임을 묻는 방식은 연좌제에 가깝다는 지적이었다.

하영이 가족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소개한 태도는 비판할 수 있어도, 확인되지 않은 의혹까지 가족 전체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함께 나왔다.

이런 가운데 하영과 작품을 함께한 일부 제작진은 간접적으로 응원의 뜻을 보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이도윤 감독과 <참교육> 홍종찬 감독은 하영이 올린 자필 사과문에 ‘좋아요’를 눌렀다.

사과 이후에도 후폭풍은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던 하영 출연 ‘삼성 아트 TV’ 광고 영상 6편을 비공개로 전환했고, 의류 브랜드 아티드 역시 하영이 모델로 나선 광고 영상을 내렸다. 보건복지부 산하 중앙응급의료센터도 하영이 참여한 공익광고를 비공개 처리했다.

다만 보건복지부는 오는 9월 계약 종료를 앞두고 실질적인 홍보대사 활동도 끝난 만큼 별도의 해촉 절차는 밟지 않기로 했다. 논란은 집안의 재산 문제로도 번졌다.

하영의 모친 이미숙 코어메드 대표가 과거 인터뷰에서 현금 1억원에 이어 2억원을 금고에 보관한 적이 있다고 밝힌 내용과 그의 1970년대 해외 유학 이력이 다시 주목받았다. 일부는 이를 근거로 집안의 재산 형성 과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냈다.

광고계·예능
줄줄이 손절

집안의 재산 형성 과정에 관심이 쏠리면서 친일재산 환수 가능성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오는 12월 친일 재산귀속법 시행을 앞두고 안상호가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하영 일가의 재산이 안상호의 친일 행위와 관련해 형성됐다는 근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안상호 역시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아 실제 재산 환수 여부를 거론하기에는 이른 상황이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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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단독] 국방부 검찰단, 내란 고발자 ‘닥치고 기소’ 막전막후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종합특검팀이 종료됐다. 12·3 내란과 관련된 수사는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마무리되지 않은 사건은 경찰 국수본으로 이첩됐다. 검찰 특수본과 특검팀의 수사에 협조한 이들이 없었다면 확인이 어려운 의혹이 산적했다. 이 중에는 정보사 공작 업무와 내란 당일 계엄군의 움직임을 알린 군인들이 있다. 대개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재판에 넘겨졌다. 수사기관 간 판단이 다른 걸 두고 형평성에 어긋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2·3 내란에는 여러 수사기관이 뛰어들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 국방부 내란 특수본, 내란 특별검사팀(특별검사 조은석), 2차 종합특검팀(특별검사 권창영) 등이다. 복수의 군인들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일부는 혐의가 있었다. 수사기관마다 판단이 달랐다는 게 핵심이다. 국방부 검찰단의 경우가 그렇다. 누군가의 공작이나 의도, 내란 당일 같은 행위를 했음에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조차 받지 않는 사례가 존재했다. 협조했는데 다른 판단 내란 특검팀과 검찰 특수본에 협조한 데 이어 재판에서 핵심 증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 중 1명은 김창학 전 수도방위사령부 군사경찰단장(대령)이다. 김 전 단장은 지난 2월 국방부 검찰단에 의해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두 달 뒤인 4월에는 법령준수의무위반 및 성실의문위반으로 파면됐다. 김 전 단장은 수사기관에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지시로 국회로 갔던 계엄군의 움직임에 대해 진술했다. 종합특검팀이 내란의 리허설이라고 판단한 국군방첩사령부 자유의 방패(FS) 훈련과 이 전 사령관의 이례적인 지시가 담긴 녹취를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엔 내란 특검팀에 제출된 적 없는 자료도 포함됐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관련 녹취에는 방첩사의 전시 합동수사본부 훈련 과정에서 수방사 실무진들이 병력 지원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김 전 단장을 포함한 전·현직 수방사 관계자들은 “‘합수단 수사관들은 경호 대상이 아니다’ ‘합수단 경호는 전례가 없는 일’이라며 병력 지원 자체에 난색을 표했다”고 진술했다. 수방사 관계자들은 “전시 상황이라면 검토가 가능하지만 평시에 병력을 지원하려면 수방사 작전계획부터 변경해야 한다. 육군본부 군사경찰실과의 협의가 필요하다”고 이 전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이 전 사령관과 방첩사의 압력에 못 이긴 수방사는 당시 훈련에 군사경찰단 50명과 35특임대대 20~25명 등 70여 명 규모 병력을 지원했다. 이 같은 진술을 확보한 종합특검팀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2024년 3월 전시나 계엄 시 부대별 임무와 병력 운용 등을 규정한 군 내부 계획 문서인 ‘전시 비문’ 개정을 추진하며 기존과 다른 방식의 합수본 운영을 준비한 것으로 의심했다. 이 전 사령관은 이 과정에서 수방사 병력 지원을 추진하며 실무진의 반대에도 병력 파견을 지시한 혐의를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두 사령관을 지난달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모든 특검에 자료 넘겨 김 전 단장을 비롯한 복수의 군 관계자들은 현재 불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반대로 행위가 비슷했던 조성현 대령(전 수방사 제1경비단장)은 훈장을 받았다. 종합특검팀은 지난달 말 조 대령을 조사한 후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조 대령은 합참 지휘통제2팀장 직을 수행하다 최근 인사 조치된 것으로 확인됐다. 조 대령이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51분 이 전 사령관과 통화하며 “그렇게 지금 임무를 줬고” “충성, 계속 작전하겠습니다”고 라고 언급한 녹취와 다음 날인 12월 4일 오전 1시2분 김 전 단장이 “(이진우) 사령관이 울타리를 넘어서라도 국회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게 안 되잖아”라고 말하자 조 대령이 “우리는 그렇게 들어왔습니다” “경찰과 협조해 한적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답한 내용을 확인한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전달하고 국회 침투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실상 ‘중간 실행자’ 역할을 했다고 결론 냈다. 김 전 단장이 기소된 점도 기소 근거로 꼽혔다. 이 전 사령관의 지시를 받은 조 대령은 예하 제2특임대대와 제35특임대대에 하달했다. 실제 35특임대대는 계엄 당시 국회 경내에 투입됐다. 종합특검팀의 판단은 내란 특검팀의 수사 결론과 배치된다. 내란 특검팀은 조 대령이 “상부의 위헌·위법적인 지시를 거부했다”며 그를 입건하지 않았다. 종합특검팀은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조 대령의 지시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았다고 의심했다. 일부 군인들 특검에 핵심 진술·자료 제출하고 불기소 군검찰, 내란 중요임무 종사 재판 넘기고 대거 파면 종합특검팀은 조 대령이 같은 해 12월4일 새벽 1시4분 서강대교 북단에 도착한 제2특임대대 2지역대장 윤덕규 소령에게 총 세 가지를 지시했다고 봤다. ▲총기와 탄약을 차량에 두고 진압봉을 챙겨 서강대교를 넘어올 것 ▲진입 방법은 국회에 이미 들어가 있는 부대와 상의할 것 ▲임무는 국회 안에 있는 인원을 끌어내는 것 등이다. 조 대령은 “2지역대장에게 정확하게 “서강대교를 넘지 말라”는 말을 한 사실이 있나요”라는 종합특검팀의 질문에 “윤덕규에게 2024년 12월4일 1시20분경 다시 북으로 올라가라고 말한 것이고, 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고 진술했다. 조성현 대령 측은 문자 그대로 “넘지 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시가 회군의 취지였다는 점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윤 소령은 “조 대령이 ‘너희가 (서강대교를) 넘어왔을 때 시민과 충돌하게 되면 크게 다친다. (서강대교 인근에) 대기하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끝까지 반대 김 전 단장과 동시에 파면된 핵심 증인 중 1명은 정성우 전 방첩사 1처장이다. 그는 지난해 6월24일 서울 용산구 중앙지역군사법원에서 열린 여 전 사령관의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정 전 처장은 검찰 특수본에서 진술했던 것처럼 “여인형 전 사령관이 당시 선관위 전산실을 통제하고 이후 민간 수사기관에 넘기며, 여의치 않으면 서버를 복사하거나 ‘떼어오라’는 3단계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했다. 정 전 처장을 비롯해 방첩사 법무실 간부들은 여 전 사령관의 지시에 대해 기술적·법률적 검토 결과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 전 사령관은 “제 기억으론 정성우 증인한테 서버를 복사해라, 떼오라고 이야기한 기억은 분명히 없다”며 “정성우에게 서버를 떼서 가져오는 방법이 있을까 정도를 문의했다면 모를까, 명시적으로 카피해라, 떼서 가져오라고 했을 것 같지 않다. 카피도 안 되는데 어떻게 떼서 가져오나?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정 전 처장은 내란 사태 당일부터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과 총 6차례 통화했다.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50분 정 전 처장은 여 전 사령관으로부터 노 전 사령관의 전화번호를 넘겨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노 전 사령관은 정 전 처장에게 “(병력이) 출발을 했느냐”라고 물었고 정 전 처장은 “이제 영외 거주자를 소집한 상황”이라고 답했다. 내란 특검팀에 협조했던 정 전 처장은 김 전 단장처럼 내란 중요임무 종사와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내란 특수본은 정 전 처장이 방첩사 인원 115명을 4개 팀으로 긴급 편성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과천·관악 청사, 선관위 수원 연수원, 여론조사 꽃 등 4곳에 출동하게 하는 등 군인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단장을 비롯해 복수의 군 간부들이 기소되자 내란 특검팀은 국방부 검찰단에 ‘‘사전 협의’가 있었어야 했던 것 아니냐’는 취지로 불만을 전했다고 한다. 군 일각에서는 정 전 처장은 아니더라도 김 전 단장과 소수의 영관급 장교들은 국방부 조사본부 차원에서 무혐의 종결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란 특검팀에 몸담았던 한 관계자는 “김창학 대령 외에도 여러 사람이 협조했고 그들 덕분에 수사를 할 수 있었던 게 컸다”며 “군검찰의 기소에 감 놔라 배 놔라 해서는 안 되고 해당 기관의 판단이지만 복수의 군 관계자들을 기소했을 때 ‘왜 저 사람은 기소 안 하느냐’는 등의 뒷말이 상당했다. 특검팀도 관련 내용을 알았기에 문제 제기를 했던 것”이라고 했다. 음모·모해 명확한데 혐의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가 아니지만 사실상 노 전 사령관과 여 전 사령관에게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박민우 전 정보사 A 여단장(예비역 준장)이다. 그는 2025년 초 국회 청문회에서 ‘노상원 수첩’에 관한 핵심 증언을 했던 인물로 주목받았다. 박 준장의 증언 후 실제 관심이 크지 않았던 노 전 사령관의 수첩의 신빙성과 중요도가 커졌다. 노 전 사령관은 정보사를 내란에 동원하려 사실상 박 준장을 축출했다. 여 전 사령관의 검찰 특수본 진술조서를 보면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박 준장의 비위, 비밀은닉, 업체 로비 등 4~5건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노 전 사령관이 비위 제보를 하지 않았으면 연락을 하지 않았을 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는 군형법상 군사기밀누설 및 암호 부정사용, 국가보안법·군사기밀보호법·남북교류협력법 위반 등 사건에 대해 수사권을 갖는다. 당시 블랙 요원 명단 유출 사건도 방첩사가 초동수사해 사건을 군검찰로 넘겼다. 여 전 사령관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건 박 준장과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간 갈등 전후다. 박 준장이 노 전 사령관의 연락을 받은 시기와도 일치한다. 박 준장은 지난 3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아직도 고집이 세냐’고 하길래 ‘그렇다’고 말한 게 전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날 내란에 동원하려 일종의 간보기 차원으로 질문했던 것 같다. 노상원에 의해 직무에서 배제됐다고 본다. 여단장이 공석이 되자 이 자리 진급을 미끼로 김봉규, 정성욱을 노상원이 조종한 것”이라고 말했다. 노상원 수첩 '핵심 증언자' 박민우, 사실상 노·여 모해로 좌천 신원식 “노상원·여인형에 의해 피해 본 것 맞다” 특검에 진술 문 전 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이던 신원식 전 안보실장이 2024년 8월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해 ‘정보사 갈등’ 교통정리를 위한 후속 조치를 약속하고 경질될 예정이었다. 신 전 실장은 박 준장과 문 전 사령관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했지만 문 전 사령관이 거부했다. 문 전 사령관은 유임됐고 노 전 정보사령관과 대통령실 경호처장이던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개입하면서 신 전 실장은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옷을 벗었다. 오영대 전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이에 관해 검찰 특수본 조사에서 “신원식 (전 국방부) 장관이 저와 원천희 국방부 정보본부장에게 문 전 사령관에 대한 보직해임·정보사령관 교체 검토를 지시했으나 2024년 9월6일, 김 전 장관이 취임하면서 문 전 사령관에 대한 ‘현 보직 유지’를 지시했다”며 “납득하기 어려운, 이해하기 어려운 인사였다”고 진술했다. 박 준장의 주장은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신 전 실장은 종합특검팀 조사에서 “박민우 장군은 여인형과 노상원에게 피해를 봤다. 문상호가 유임되지 않았으면 박 장군도 재판에 넘겨지거나 좌천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며 “큰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둘에게 법적 문제를 모두 취하하고 정리하라고 얘기를 했던 거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