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내가 쓰는 검색, 지도, 민원, 병원 예약, 금융 심사가 모두 외국 AI의 판단 기준 위에서 작동한다면 어떨까? 그때 문제는 단순한 기술 종속이 아니다. 내 정보와 권리가 누구의 기준으로 처리되고, 대한민국의 디지털 생태계가 누구의 규칙에 따라 흔들리는가의 문제다.
대한민국 인공지능(AI) 산업의 미래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다. AI는 더 이상 특정 기업의 서비스나 연구실의 기술이 아니다. 국민이 매일 사용하는 통신, 금융, 의료, 교통, 행정 서비스의 기반을 이루는 핵심 인프라다.
따라서 AI 기술 접근과 활용이 글로벌 기술 안보 규제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한 산업 문제가 아니다. 국민 편의와 국가 경쟁력, 나아가 디지털 주권 전체가 함께 흔들릴 수 있는 문제다.
최근 세계적인 AI 기업의 첨단기술 활용을 둘러싼 국제 기술 안보 심사 과정에서 국내 AI·통신 관련 기업들이 다양한 해석과 우려의 대상이 됐다. 일부 보도는 한국 기업의 과거 공급망 이력과 해외 협력 관계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지만, 이번 사안을 특정 장비나 특정 기업의 문제로만 단순화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기술 안보 심사 기준이 빠르게 강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복합적 리스크로 봐야 한다.
핵심은 어느 기업이 문제였느냐가 아니다. 한국 기업과 정부가 해외 규제기관에 우리의 지분 구조, 공급망 이력, 기술 협력 관계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명하고 관리할 수 있느냐다. 글로벌 기술 안보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복잡한 해외 협력 관계나 공급망 이력이 충분한 맥락 없이 해석될 경우, 개별 기업의 문제가 한국 AI 생태계 전체의 신뢰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다.
현재 시장에서는 이 문제를 친미냐 친중이냐, 국산이냐 외산이냐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AI 생태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초거대 AI 모델, 클라우드 인프라, 반도체, 데이터센터, 통신망, 공공서비스는 모두 복잡하게 연결돼있다.
특정 시장이나 단일 규제 체계에 과도하게 의존해서도 기술 주권을 지킬 수 없고, 국제 협력 없이 독자 생태계만으로 AI 경쟁력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필요한 것은 폐쇄적 국산화가 아니라, 협력하되 끌려가지 않는 전략적 균형이다.
우리가 이 문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AI가 미래 디지털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안보 심사와 규제 변화에 적시에 대응하지 못해 최고 수준의 AI 기술을 제때 도입하지 못한다면 피해는 기업의 영업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스마트폰 서비스, 내비게이션, 공공 민원, 금융 심사, 병원 예약처럼 국민이 일상에서 쓰는 디지털 서비스의 품질이 뒤처질 수 있다. 이는 국민 편의 저하와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주요 선진국들은 기술 안보 규제와 민간의 기술 협력 기능을 분리해 관리하면서도, 동시에 자국의 AI 기술 역량과 협력 네트워크를 키우고 있다. 까다로운 안보 기준을 충족하되, 독자적인 기술 기반을 확보하고 제3국과의 협력도 다변화하는 방식이다.
반면 우리는 해외 규제 신호가 나올 때마다 기업과 시장의 불확실성이 먼저 커지고, 이후 정부와 산업계가 사안을 정리해가는 대응 부담을 반복하고 있다. 이제는 사후 대응이 아니라 사전 설명과 선제 관리의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와 기업은 단순 이분법적 프레임을 넘어 보다 정교한 대응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회성 캠페인이나 사후 대응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점검과 설명의 체계다. 우리 기업 스스로가 해외 규제기관이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운 복잡한 지분 구조, 과거 공급망 이력, 해외 협력 관계를 선제적으로 점검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민간기업 혼자 거대한 글로벌 규제 네트워크를 상대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와 기업이 함께 글로벌 규제 변화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산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일 민·관 공동 대응 체계를 가동해야 한다.
AI 주권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시민의 검색 결과, 이동 경로, 행정 처리, 금융 접근성, 의료 서비스의 기준을 누가 정하느냐의 문제다. 글로벌 규제 환경에서 불확실성을 줄이고 대한민국 AI의 생존과 주권을 지키는 일은 결국 국민의 권리를 지키는 일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기술 협력과 안보 규제 사이에서 흔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설명하고 대응하며 협상할 수 있는 AI 생존 전략을 갖춰야 한다.
[배성훈 박사는?]
▲LX공간정보연구원 AX국토융합그룹장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 자문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