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든 한국 축구는 깊은 내상에 신음하고 있다. 전술 부재, 선수단 관리 실패, 리더십의 실종까지.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상황에서 축구 팬들이 원한 것은 사령탑으로서 실패의 원인을 명확히 진단하고, 상처받은 팬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는 것 단 하나였다.
그러나 홍명보 전 감독이 선택한 것은 ‘도피성 미국행’과 “(자신의 입장을) 언젠가는 이야기하겠다”는 무책임한 여운이었다.
경질성 사퇴 이후 귀국한 지 단 이틀 만에 비밀리에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의 행보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특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를 중심으로 축구협회 운영과 대표팀 실패에 대한 청문회 추진이 논의되는 시점을 앞둔 상황이라면 그 의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취재진의 청문회 참석 여부 질문에 홍 전 감독은 “귀국 날짜를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한 모습은, 그가 그토록 강조하던 캡틴이자 수장의 당당함과는 거리가 멀다. 거센 비난의 소나기를 잠시 피하고 보자는 얄팍한 계산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더욱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던 것은 출국길에 남긴 그의 “제가 할 이야기는 있는데, 언젠가는 이야기가 잘 나올 것”이라는 애매모호한 발언이었다. 오늘 하기 힘든 발언이 마치 미래가 돼서 쉽게 말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있었던 걸까?
이 모호하고 묘한 뉘앙스의 발언은 책임감 있는 ‘지도자의 언어’가 아니다. 실패한 감독은 핑계가 아닌 결과로 말해야 하며, 털어놓을 진실이 있다면 당장 한국 축구의 재건을 위해 명명백백히 밝혔어야 했다. ‘언젠가는 말하겠다’는 식의 암시는 결국 자신은 억울하며, 실패의 책임이 다른 곳(축구협회 혹은 보이지 않는 세력)에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유치한 언론 플레이에 불과하다.
그가 남긴 이 비겁한 쉼표 때문에 한국 축구는 월드컵 실패의 원인을 정확히 복기하지도 못한 채, 또다시 폭로와 폭탄 돌리기의 늪으로 빠져들게 생겼다. 선수단 내분설에 대해서도 “전혀 없었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져야 할 전술적·정치적 책임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홍 전 감독은 현역 시절부터 ‘영원한 리베로’ ‘카리스마 있는 리더’로 추앙받았다. 리더의 진짜 가치는 화려한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참담한 실패의 한복판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비난이 두려워 등 돌려 떠나는 뒷모습, 그리고 억울함만 흘리는 모호한 발언 속에서 우리가 알던 당당한 리더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 LA의 따뜻한 볕 아래에서 그가 취할 휴식이 한국 축구의 멍든 가슴을 치유해 주지는 않는다. 홍 전 감독이 던진 “언젠가는”이라는 말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아야 한다. 당당하게 청문회와 대중 앞에 서서 실패를 인정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한국 축구 레전드로서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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