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한 종교들의 쿨한 여름 나기

절과 성당서 솔로 탈출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예능프로그램 <나는 솔로>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연애사가 펼쳐지는 곳이 있다. 바로 절과 성당이다. 천주교와 불교가 ‘성스러운’ ‘예스러운’ ‘어려운’ 등 수식어를 벗고, 청춘 남녀가 만날 수 있도록 팔 걷어붙이며 돕고 있다. 같은 종교 신자끼리, 혹은 어떤 종교든 상관없이 운명으로 엮인 짝을 찾으려는 청춘들이 눈을 반짝이며 종교계가 벌이는 축제 안으로 모여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즈음해서 혼인율과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잦은 기사에 익숙해져 지금도 2030 청춘을 염려하고 있다면 조금이나마 안심해도 좋겠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3월19일 발표한 ‘2025 혼인‧이혼 통계’를 살펴보면, 2021년까지 감소세를 보이던 혼인 건수는 2022년부터 2025년까지 꾸준한 증가세로 바뀌었다.

팬데믹 이후
결혼율 증가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 단체, 지자체에서 청춘 남녀를 응원하고 있는 덕이다. 그중에서도 종교 단체가 주선하는 프로그램이 특히 눈에 띈다. 천주교 ‘Jesus 시그널 피정(이하 시그널 피정)’과 불교 ‘나는 절로’는 매번 긴장감 넘치는 경쟁률을 기록하며 신청자를 받고 있다.

시그널 피정을 고안한 안미경 선교사(세례명 미카엘라)는 ICPE선교회 부지부장을 맡고 있다. ICPE선교회는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가톨릭 단체다. 1985년 몰타에서 설립, 2002년 교황청 정식 인준을 받았다.

안 선교사는 “코로나19 이후 성당에 발길을 끊고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며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청년을 숱하게 봤다”고 했다. 또 “청춘들이 이성을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결혼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 섣불리 용기 내지 못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안 선교사는 이 청년들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시그널 피정 프로그램을 촘촘하게 완성해 나갈 수 있었다.

‘피정’은 ‘일상생활 안에 속하는 모든 업무와 소음을 일시 중단하고 외딴곳에 찾아가 하느님과 깊은 인격적 만남을 갖는 영성 수련’이라고 한다. 안 선교사 설명에 따르면 ‘쉽게 말해 가톨릭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 혹은 힐링 캠프 같은 프로그램’이다.

피정 대상은 가톨릭 미혼 신자(만 29~45세)로 제한을 둔다. 매년 29~35세 차수와 35~45세 차수를 구분해 남녀 비율을 맞춰 15~16쌍으로 진행한다. 단순히 남녀가 만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대신 올바른 신앙 가치관을 정립해 준비된 배우자가 되기를 목표로 한다.

프로그램 첫째 날에는 사랑을 주제로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둘째 날과 셋째 날에는 자기 성찰 강연, 조별 토론, 게임, 산책, 일대일 대화 등을 통해 참가자들이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유기적으로 이어나간다.

피정 이후에는 후속 모임을 연계해 지속적인 교류를 지원한다고 한다. 안 선교사에 따르면 교회 안에서 터부시되기 쉬운 성과 결혼 이야기를 솔직하고 현실적으로 나눌 수 있는 장을 제공한다.

프로그램 운영하다 성혼도
선교사가 맺어낸 커플 9쌍

안 선교사는 시그널 피정을 다채롭고 정교하게 구성하기 위해 지자체 등이 운영하는 단체 미팅 프로그램과 결혼정보업체에서 주선하는 맞선 등을 참고했다. 이렇게 봉사하며 보낸 5년 동안 인연을 맺은 커플 수는 적어도 20쌍 이상, 성혼한 커플은 9쌍이 됐다.

안 선교사 역시 시그널 피정 프로그램을 통해 봉사하다가 배우자를 만나 지난 4월 성혼했다. 처음에는 봉사하는 여성 선교사와 짝을 찾기 위해 프로그램을 찾은 남성 참여자로 만났다. 자신감이 부족해 보이는 남성 참여자에게, 그가 얼마나 멋지고 매력 있는 사람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안 선교사가 상담해 주면서 두 사람이 처음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그는 삶에서 신앙이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또 서로 각자가 있는 그대로 ‘나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끌렸다고 했다. 안 선교사 배우자는 “내심 사랑하는 이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표현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자신의 매력을 알아봐 준 안 선교사라면 기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듯싶다.

안 선교사는 “나 또한 여타 청년들처럼 상대를 볼 때 우선 조건부터 따졌었다. 그러면서 왜 내게는 좋은 짝을 주지 않느냐며 불평하던 때도 있었다. 동시에 짝 없는 자신을 깎아내리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던 그가 시그널 피정을 통해 여러 해 봉사를 거듭하면서 이성을 마주하는 태도를 바꿀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깨닫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며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고 했다.

신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니,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안 선교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선물처럼 서로에게’ 가 닿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안 선교사는 상대의 내면을 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상대의 있는 그대로 모습에서 존중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며 만났다는 그의 이야기에는 울림이 있었다.

프로그램 이후 많은 참가자가 “시그널 피정 이후 이성을 보는 기준이 바뀌었다” “나에 대해 잘 알게 됐다” “연애와 결혼에 대해 갖던 부정적 시각이 바뀌어 결혼하고 싶어졌다” 등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이후 연애 상대가 생겼다거나 결혼했다는 연락을 종종 받았다고도 했다. 안 선교사의 친구 역시 시그널 피정을 통해 커플이 됐다고도 전했다.

봉사하다
결혼까지

안 선교사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며 나를 내어주는 일이 얼마나 거룩하고 참되고 사랑스러운 일인지. 비혼을 결심하거나, 결혼이 두렵다는 청년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9회째를 맞는 올해 첫 번째 시그널 피정은 이달 26일부터 28일까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 마리스타교육관에서 열린다. 안 선교사는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사랑과 결혼이 다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나를 내어주는 기쁨과 희생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경험이 자신을 얼마나 성장시키는지 많은 청년이 깨닫길 원한다”며 올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마음가짐을 전했다.

“번뇌 가득한 중생들이여, 극락도 락(樂)”을 캐치프레이즈로 걸며 올해 ‘서울국제불교박람회’를 MZ 놀이터로 만든 불교는 어떨까. ‘힙’을 수식어로 갖게 됐다는 명성에 걸맞게, 그 어떤 종교보다 청춘 남녀 만남에 적극적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이하 재단)은 2013년부터 운영하던 ‘만남 템플스테이’를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나는 절로’로 새롭게 단장해 운영하고 있다. 과거 보건복지부가 주도하던 저출산 문제 해결 프로그램으로 출발했으나, 최근 예능프로그램처럼 재미 요소를 가미하며 인기가 급상승했다.

참가자는 나이와 직업, 이름 등 개인정보를 숨긴 채 대화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ENA‧SBS Plus 인기 예능 프로그램 <나는 솔로> 운영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블라인드 데이트’ ‘야간 자유 데이트’ ‘플로깅 데이트’ 등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가해 호응을 얻고 있다.

천주교가 운영하는 시그널 피정과 달리, 나는 절로는 종교를 불문하고 참가자를 받는다.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과거 템플스테이 체험 프로그램을 그대로 옮겨오는 데 국한하던 것과 차별을 둔 것이 인기 비결이 됐다.

재단 홍보 담당자는 “어떤 종교를 가진 분이든 절을 좋아한다”며 “절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 신뢰감이 다른 곳에서 운영하는 청춘 남녀 만남 프로그램과 구별하게 하는 차별점”이라고 설명했다.

‘211 대 1’
열띤 참여율

템플스테이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진행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절에 기거하는 스님에게 고민을 상담하거나 조언을 듣는 것도 가능하다. 이 또한 일반적인 청춘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에는 없는 특별함이다.

조계사, 전등사, 화계사, 쌍계사, 선운사 등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절 중 한 곳을 섭외해 운영하는 방식도 인기 비결 중 하나다. 바다를 끼고 있는 낙산사는 여름, 동백꽃이 흐드러지는 선운사는 봄. 계절에 걸맞은 비경과 체험 프로그램도 청춘 남녀의 긴장과 설렘을 한껏 물오르게 한다.

홍보 담당자는 “참여자 만족도가 매우 높다. 1박2일 프로그램이 짧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라며 “오는 8월에는 2박3일 일정으로도 운영해 보려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나는 절로는 매 회차를 거듭하며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

재단은 보건복지부로부터 나는 절로 프로젝트 사업비 일부를 지원받았다. 홍보 담당자는 “최근 저출산 등 문제가 심각하다”며 “미혼 남녀가 만나는 기회를 넓히기 위해 정부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나는 절로가 입소문을 타며 개신교, 천주교 등 다른 종교로도 프로그램을 확장할 가능성이 열렸다. 향후 정부가 ‘나는 교회로’ ‘나는 성당으로’ 등 프로젝트를 지원하게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온라인상에서는 “절이라고 고기를 안 주는 게 아니고 굉장히 속세에 가까운 메뉴, 너무 좋아, 다 맛있었다” “완전 후회 안 함, 강추” “정말 추천하고 애정하는 나는 절로” “1박2일 동안 절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서 너무 좋았고 잊지 못할 것 같다” 등 긍정 후기가 잇따라 올라오고 있다.

재단은 다음 달 11~12일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서 나는 절로를 진행한다. 이번 회차에는 남성 1665명, 여성 2570명 등 총 4225명이 지원했다. 프로그램을 시작하던 2023년 이후 최다 인원 신청 기록이다.

남녀 각각 10인이 참여하게 되므로, 경쟁률은 남성 165.5 대 1, 여성 257 대 1이다. 남녀를 구분하지 않으면 경쟁률이 211 대 1에 달한다.

‘나는 솔로’ 대신 ‘나는 절로’
종교 불문 청춘 남녀 사랑 찾기

이번 낙산사 편은 강원관광재단과 협업으로 진행한다. 첫날 아침부터 제비뽑기로 ‘두근두근 랜덤 데이트’를 진행한다. 점심 공양 데이트 상대를 결정하며, 이때 1차 선택은 남성이 한다.

‘수다 삼매경’, 일명 ‘TMI 토크’ 시간에는 결혼과 출산 가치관에 대해 심층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후 가치관이 잘 맞는 상대를 찾아 도량을 둘러보는 데이트를 하게 된다. 이번에는 여성이 상대를 선택한다.

이 밖에도 ‘블라인드 데이트’ ‘저녁 공양 데이트’ ‘야간 자유 데이트’ 등이 준비돼있다. 청춘 남녀 참가자가 1박2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둘째 날에는 해변을 바라보며 ‘커플 요가’를 하고 최종 선택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한다. 이때 맺어진 커플에게는 낙산사 플로깅 데이트 시간이 주어진다.

가장 최근 운영한 지난 5월 동화사 프로그램까지 총 185쌍이 나는 절로에 참가했다. 이 중 무려 83쌍이 커플로 이어졌다. 홍보 담당자에 따르면 성혼까지 이룬 커플은 총 3쌍이며, 오는 10월 결혼을 앞둔 커플에 더해 대여섯 커플이 결혼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불교 신자들만을 맺어주는 프로그램은 따로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에서는 ‘결혼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1993년 개설한 ‘사찰 인연 맺어주기’ 프로그램의 원조 격이다. 결혼정보업체와 비교해 가입비가 저렴하고, 불교 신자 가족 중심으로 주선이 이뤄져 신뢰도가 높다.

일단 인연이 맺어지면 봉은사 주지 스님이 주례를 봐주며, 전통 사찰 혼례를 진행할 수도 있다. 상업적 결혼정보회사 만남이 부담스러운 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원불교 역시 지난해 저출산 극복을 목표로 지난해 ‘다붓다붓 맞선 캠프’를 세 차례 진행했다. 아이스 브레이크, 집단 상담, 명상, 역할극, 성격 유형 검사 및 강의 등 프로그램으로 구성해 선보였다. 원불교 홍보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올해는 아쉽게도 운영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한동안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맞선과 소개팅, 미팅 등을 불편해하는 2030세대가 많았다. 이들이 추구하는 바와는 별개로, 코로나19 이후 단체 모임이 빠르게 흔적을 감췄다. 그만큼 이성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줄었다는 뜻이다.

절서 만나는
견우와 직녀

‘시절 인연’은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모든 만남과 일의 성사는 ‘때(시기)’와 ‘조건’이 맞아야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일상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고, 억지로 붙들거나 밀어내지 말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 혹은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지는 직접 부딪쳐 알아보는 수밖에는 없다. 청춘이 스스로 시절 인연을 알아보고 오래도록 붙들어 두기 위한 ‘부딪침’ 기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종교계에서 다방면으로 이뤄지고 있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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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광주에서 일어난 ‘장윤기 사건 증거인멸’ 논란으로 경찰 조직이 시험대에 올랐다. 피의자 가족이 나서서 증거를 없애고 이 과정에 주변 경찰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 사건으로 검찰청 해체 이후 수사 권력을 한 손에 쥘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한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던 남자에게 살해됐다. 여학생을 구하려던 남학생은 크게 다쳤다.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고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얼굴을 공개했다. 생떼 같은 10대 여고생의 황망한 죽음에 국민은 경악했다. 하지만 국민이 더 분노한 지점은 따로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비위 의혹은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조직 명운 달렸다 장윤기 사건에서 수사 기밀 유출, 증거인멸, 초동수사 부실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장윤기의 혐의를 경찰이 나서서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경찰은 장윤기에게 강간·살인이 아닌 일반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형량이 더 높은 강간·살인 혐의를 입증할 케이블 타이 등의 증거를 경찰이 없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검찰의 보완수사로 드러났다. 현재 정치권은 해체될 검찰에 보완수사권을 남겨둘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심지어 여권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보완수사로 경찰의 부실 수사 문제가 확인되면서 권력을 한쪽에만 과도하게 몰아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부상하고 있다. 홍석기 국가수사본부장이 장윤기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유착 의혹을 두고 “명운을 걸고 수사하겠다”고 말한 것은 조직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최대한 불식하겠다는 의도도 담겼다는 게 중론이다. 안 그래도 검찰청 해체로 수사 공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 이번 일로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찰 수사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2023년 8월 공동대표였던 하모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한 R스타트업의 이모 대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대표는 하씨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 단독대표가 돼 R스타트업을 떠안았다(<일요시사> 1493호 ‘<단독>스타트업 대표 1000억대 역외탈세 의혹’). 앞서 두 사람이 공동대표일 무렵 R스타트업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마스크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에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있던 때였다. 하씨는 마스크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법인을 이용해 수급하겠다고 했다. 미국의 한 회사와 판매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사업은 ‘마스크를 수급할 수 없게 됐다’는 하씨의 말에 흐지부지됐다. 이후 마스크 관련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하씨는 R스타트업을 떠났다. 2022년 3월경에는 서로 연락도 끊겼다. 하씨의 회사 이메일 계정도 이 시기에 정지 조처됐다. 회사와도, 사적으로도 이 대표와 하씨의 관계가 끝난 것이다. 상황은 2023년 6월 이 대표가 하씨의 이메일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며 반전됐다. 장윤기 사건으로 신뢰 바닥 새로운 자료 찾아도 시큰둥 이 대표는 하씨의 이메일을 통해 흐지부지된 줄 알았던 마스크 사업이 몰래 진행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씨가 가족과 지인을 동원해 마스크를 수급하고 수출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이 시기에 알게 됐다.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인천 연수경찰서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연수경찰서는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를 1000억원대로 판단했고 수사를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계로 넘겼다. 이 대표에 따르면 당시 연수경찰서에서 추정한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는 1400억원에 달한다. 이 대표는 “하씨는 회사(R스타트업) 메일 계정을 이용해 마스크 거래를 진행했다. 그사이 회사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를 더욱 화나게 한 건 경찰의 태도였다. 처음 사건을 맡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미진한 수사 태도로 이 대표의 불만을 샀다. 이 대표는 “하씨가 한국에 있지도 않은데 출국금지를 걸지를 않나, 경제범죄를 수사하면서 CFO가 뭐냐고 묻질 않나, 이렇게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했는데 고소인 조사를 20분밖에 하질 않나, 수사 자체가 엉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2024년 2월 말 하씨를 불송치 처분했다. 하지만 인천지방검찰청(이하 인천지검)의 판단은 달랐다. 인천지검은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수사를 통해 하씨와 가족의 해외 계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찰의 불송치에 대해 보완수사를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때가 2024년 3월이다. 경찰 수사에 답답함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와 관련된 자료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한다. 특히 하씨의 회사 계정으로 오간 이메일을 꼼꼼히 살폈다. 그 결과 하씨가 카카오뱅크를 통해 6개월 동안 거래한 내역을 찾아냈다. 이 대표는 거래 내역에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돈이 여러 차례 오간 것을 발견했다. 이 대표는 “2024년 5월에 거래 내역을 발견해 바로 경찰에 전달했다. 경찰이 나를 조사에 부른 건 (그해) 8월경이었는데 그때까지 거래 내역에 대한 어떤 수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수사 권한도 없는 일반인이 이 정도로 자료를 찾아 건넸으면 좀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반 국민은 경찰보다 계좌 접근 권한이 제한돼있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고소 이후 3년 지나 하씨와 그 가족의 필리핀 계좌를 보기 위한 국제 공조에도 시간이 지체됐다고 토로했다. 검찰에서 보완수사를 요구한 때가 2024년 3월29일이었는데 그해 7월에서야 공조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처음 고소인 조사를 받을 때부터 필리핀 법인 이야기를 숱하게 했다. 필리핀 법인에 보낸 은행 송금증, 해당 필리핀 법인이 운영하는 SNS 내용, 현지 언론 기사까지 제출했을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보완수사가 떨어지고 나서야 공조를 진행하면 기다리는 고소인은 답답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하씨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써준 사실확인서도 문제로 지적했다. 이 대표는 “해당 인물이 사실확인서를 써준 이후에 하씨와 함께 사업한 의혹이 있다. 이런 사람이 써준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있나. 경찰 조사에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진술했는데 ‘고소인은 ○○○의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없음’ 이렇게 한 줄만 적었더라. 근거를 가지고 말했는데 경찰은 나를 ‘우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대표가 경찰에 제출한 자료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하씨를 불송치 처분할 때 근거가 됐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볼 여지가 생겼다는 점이다. 당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불송치 이유로 ▲(하씨가) 거래대금을 몰래 착복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 거래가 성사된 사실이 없다면서 배임 혐의를 부인한 점 등을 들었다. 이때 ▲미국 A사와의 거래 과정에서 필리핀 법인을 사용하기로 합의한 점 ▲미국 A사 측의 거래 취소 요청 이메일 ▲계약 관련자의 사실확인서 등을 ‘혐의없음’의 근거로 제시했다. 즉, 경찰은 하씨가 마스크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마스크 사업으로 수익을 본 것도 없고 그러니 배임 혐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이 대표는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은 마스크 사업 과정에서 돈이 오간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고, 사실확인서 역시 동업 관계에서 나왔기에 그 배경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료만 제대로 봤어도 수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경찰의 결론 자체를 뒤집는 자료 아닌가”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지난해 1월 이 대표는 하씨의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하씨가 마스크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수급을 담당한 업체가 있는데, 그곳의 대표와 이름이 같았던 것이다. “확인해 달라” 호소에도… 또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하씨가 2억4000만원에 이르는 신용 미수 거래를 한 내역도 찾아냈다.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했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신용 미수 거래금이 2억원이 넘는다는 건 담보 제공 현금이 1억5000만원 이상 있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스크 사장 이름을 알아낸 것도 그렇다. 대단한 기술을 쓴 것도 아니고 거래 내역에 있는 사람 이름과 다른 단어를 인터넷에서 조합해 검색했더니 내용이 나왔다. 이건 내가 다 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경찰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2계로 수사팀을 한 차례 바꾼 것 빼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4월30일 ‘수사 중지’를 결정했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이 대표는 하씨의 거주지 주소가 바뀐 것을 지적하면서 ‘이송’을 요청했지만 ‘보완수사 중에는 관할지 이송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후 수사는 1년 넘게 멈춘 상태다. 이 대표는 국세청에도 관련 내용을 제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국세청에 같은 자료를 냈는데 국세청은 조사를 진행한 뒤 하씨가 ‘탈세를 한 게 맞다’는 취지로 답했다. 하지만 경찰에 그 사실을 알리자 ‘국세청 관계자와 통화했는데 사건과 관련 없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국세청에 확인했더니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왜 거짓말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그사이 하씨가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9~10월경 가상자산 전문 매체 기사에서 하씨의 영어 이름을 발견했다. 하씨가 ‘키키캣 코인’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이게 사기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하씨가 코인사업을 하면서 ‘이태리 석유 재벌의 아들’인 척했다는 글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불송치했다 보완수사 결정 “그건 1계에서 처분한 것” 이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하씨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도중에 또 다른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뜻이 된다. 이 대표는 “(키키캣 코인의) 시가총액이 1억달러까지 올랐다가 현재 100만달러까지 떨어진 걸로 안다. 키키캣 코인을 구매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은 피해자 방이나 다름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중지된 수사를 재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하씨의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페이퍼컴퍼니를 운영한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하씨와 거래한 마스크 제조업체는 여러 곳인데 수출을 진행한 곳은 하씨 동생 명의의 페이퍼컴퍼니로 확인된다”며 “이 내용을 근거로 수사를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경찰은) ‘규정 위반’이라고 윽박질렀다”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 규칙 제102조(수사 중지 사건 수사 재개)는 ‘경찰은 수사 중지된 사건의 피의자를 발견하는 등 수사 중지 사유가 해소된 때에는 …(중략)… 즉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경찰과 이 대표의 주장이 엇갈린다. 경찰은 수사 재개에 필요한 요건을 국제 공조 수사 결과라고 말했다. 반면 이 대표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는데 왜 수사를 재개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이 대표는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결과가 아직 회신되지 않았다는 건 하씨의 해외 (계좌) 자료가 필요한 일부 수사에 제약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하씨의 마스크 사업 규모를 확인하는 정도에 필요한 자료”라며 “하씨의 여동생이 페이퍼컴퍼니를 갖고 있다는 의혹은 수사가 시작된 이후 3년여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다. 수사를 재개하고 관련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다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2계 담당자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올 때까지 수사를 재개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씨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언제쯤 올 것으로 예상되냐는 질문에도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또 앞서 하씨를 불송치한 내용에 대해 거론했을 때는 “그 부분은 1계에서 처분한 것”이라며 “우리(2계)는 검찰의 보완수사 요청 이후 수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소인이 제출한 자료는 경찰 수사 규칙에 따라 사건 기록에 편철해 놨다”며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없어도 수사를 재개할 수 있는지 국수본(국가수사본부)에 질의해 둔 상태”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수사가 길어지는 사이 하씨가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범죄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부분 아닌가. 피고소인이 현재 받는 업무상 배임 혐의 외의 별건 수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 대표가 담당 수사관에게 언급한 하씨의 코인 사업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