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멀어진 경자유전 76년

농민은 줄고 일반인 소유는 늘고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전국 농지 전수조사에 나서면서 헌법상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농지 투기와 불법 보유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반면, 이미 임차농지 비율이 절반에 달하는 현실에서 70여년 전 만들어진 원칙을 오늘날 농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느냐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농지 투기 근절과 농촌 현실 사이에서 해묵은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는 중이다.

지난 5월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은 농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농지 전수조사와 처분명령 강화 필요성을 언급하며 사실상 농지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정부가 농지를 문제 삼은 이유는 간단하다. 농지가 더 이상 농사를 짓기 위한 땅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투자 수단으로 변질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지 전수조사
칼 빼든 정부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보다 땅을 가진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온다. 농사를 직접 짓지 않으면서도 개발 기대감만으로 농지를 보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 경작하게 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구조가 청년농과 귀농인의 농지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고 보고 있다. 땅값이 오르면서 정작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은 농지를 구하지 못하고, 농업과 무관한 사람은 시세차익을 기대하며 농지를 사들이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 대통령 역시 국무회의에서 “산골짜기에 버려지다시피 한 땅도 값이 너무 올라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농지가 생산수단이 아닌 자산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핵심은 헌법에 명시된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다. 경자유전은 말 그대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해야 한다는 것으로, 우리나라 농지제도의 출발점이자 지금도 헌법에 명시돼 있는 기본 원칙이다.

경자유전이 등장한 배경은 해방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농촌에는 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공존했다.

상당수 농민은 자신이 경작하는 땅을 소유하지 못한 채 수확물 일부를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토지 소유가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농촌 빈곤과 불평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자 정부는 1949년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농지개혁의 핵심은 ‘땅은 농민에게’였다. 정부는 대규모 농지를 매입해 실제 경작자에게 분배했고, 이를 통해 지주·소작 구조를 해체하려 했다. 이후 경자유전은 우리 농지정책의 기본 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헌법 제121조는 “국가는 농지에 관해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농지법 역시 원칙적으로 농업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사람이 아니면 농지를 소유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정부가 이번 농지 전수조사를 추진하는 것도 결국 이 원칙을 다시 작동시키겠다는 의미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농사를 안 짓는 사람은 농지를 갖고 있지 못하게 해야 한다”며 “법을 만들어 놓고 어겨도 되게 만들면 그게 법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걸리면 3년에 한번씩 농사짓는 척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현행 제도의 허점도 지적했다.

절반은 빌린 땅에서 농사
임차농지 비율 최대 60%

이 같은 문제의식 아래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전국 단위 농지 전수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올해는 농지법이 시행된 1996년 이후 취득한 농지를 중심으로 조사하고, 내년에는 그 이전 취득 농지까지 범위를 확대한다. 사실상 전국 농지 전체를 들여다보겠다는 계획이다.

조사 대상 면적은 약 115만㏊에 달한다. 정부는 약 5000명의 조사 인력을 투입하고 드론과 항공사진, 위성 영상, 인공지능(AI) 기술까지 활용해 실제 경작 여부를 확인할 방침이다. 토지거래허가구역과 수도권 농지, 외국인 소유 농지, 농업법인 보유 농지 등 투기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지역과 유형은 중점 점검 대상에 포함됐다.

정부는 이번 전수조사를 통해 농지 투기와 불법 보유를 뿌리 뽑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정부가 되살리려는 경자유전 원칙은 이미 농촌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농지를 소유한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짓는 구조는 오랫동안 우리 농지제도의 기본 원칙이었다.

하지만 농촌 고령화와 인구 감소가 이어지면서 농지를 소유한 사람과 실제 경작하는 사람이 다른 경우가 빠르게 늘어났다. 투기 목적 농지는 정리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현실적으로 농촌의 농지 소유 구조가 이미 크게 달라진 상황에서 일률적인 규제와 단속이 또 다른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표적인 경우가 임대농지다. 통계청과 농업 관련 연구기관 자료를 종합하면 현재 전체 농지 가운데 임차농지 비율은 약 45% 수준으로 추산된다. 비공식 임대차까지 포함할 경우 50~60%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농촌 현장에서는 이미 절반 가까운 농지가 남의 땅을 빌려 농사짓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고령화다. 현재 농업경영주의 절반 이상은 70세 이상 고령층이다. 상당수 농민은 나이가 들면서 직접 농사를 짓기 어려워졌고, 농지를 이웃 농가나 전업농에게 빌려주는 방식으로 농지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형태가 법적으로는 불법 임대차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주인 따로
일꾼 따로

실제로 농촌에서는 “농지를 놀릴 수는 없어서 빌려준 것뿐인데 갑자기 위법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반응도 나온다. 농사를 지을 체력은 없지만 그렇다고 평생 일군 땅을 당장 처분하기도 어려운 고령 농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상속 문제도 있다. 농촌 인구 감소가 계속되면서 농지는 점점 도시 거주 자녀에게 상속되고 있다. 농민인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농지는 자녀에게 상속된다. 하지만 자녀 상당수는 이미 도시에서 생활하고 있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상속을 통해 농지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농업인 소유 농지가 늘어나는 구조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향후 고령농 은퇴와 상속이 계속되면서 비농업인 소유 농지 비중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농지법 역시 현실을 반영해 다양한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상속 농지, 주말·체험 영농용 농지, 은퇴 농업인 소유 농지 등은 직접 경작하지 않더라도 일정 조건 아래 소유가 가능하다.

농업 법인 역시 농지를 보유할 수 있다. 문제는 예외가 늘어나면서 원칙과 현실의 간격도 함께 커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농촌에서는 “경자유전은 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는 말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농사를 짓는 사람과 땅을 소유한 사람이 따로 존재하는 구조가 이미 고착화됐기 때문이다.

한편, 전수조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농지 가격이 하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농민들에게 농지는 사실상 노후 자산이다. 특히 농지연금을 이용하는 고령 농민들의 경우 농지 가치가 연금액 산정에 영향을 미친다. 전수조사 이후 대규모 처분명령이나 매물이 쏟아질 경우 농지 가격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투기 근절
현실 괴리

청년농 역시 마냥 반기지만은 않는 분위기다. 농지 가격 안정 자체는 긍정적이지만 조사와 단속 과정에서 임대차 시장이 위축될 가능성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청년농 상당수는 자기 땅이 아닌 임차농지에서 농사를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지 임대가 위축되면 오히려 신규 농업인의 진입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문가들 역시 투기 근절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적인 대안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국회입법조사처와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등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규제와 단속만으로는 농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고령농이 스스로 농지를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제도와 청년농에게 안정적으로 농지가 공급될 수 있는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지 투기 문제까지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농촌의 현실이 바뀐 것과 별개로 농지가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 수단으로 활용되는 문제 역시 꾸준히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농지는 원래 농업 생산을 위한 토지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농업 수익보다 개발 가능성이나 시세차익 기대가 가격을 결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수도권이나 신도시 예정지, 산업단지 조성 지역 주변에서는 농지가 사실상 투자 상품처럼 거래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1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신도시 예정지 농지 투기 사건이다. 당시 일부 직원들은 직접 농사를 지을 것처럼 서류를 제출해 농지를 취득한 뒤 개발 이익을 노렸다는 의혹을 받았다.

농민단체들 역시 현재 농지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은 최근 성명을 통해 “통계상 임차농 비율은 이미 60%를 넘어섰고 현장 농민들이 체감하는 수준은 70%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농사를 짓는 사람과 농지 소유주가 분리된 구조가 한국 농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이 같은 변화가 단순히 투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 상속 증가 등 구조적인 변화 속에서 경자유전 원칙만으로 현재 농촌 현실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사상 처음 농지 전수조사
상속 농지 늘고 농민 감소

실제로 일부 농촌 지역에서는 농지를 빌려줄 사람은 있어도 경작할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수조사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엇갈린다. 투기 목적 농지는 정리해야 한다는 데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농촌 현실까지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규제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전수조사가 단순한 현황 파악에 그치지는 않게 하겠다는 입장이다. 농지 소유와 이용 실태를 확인하는 동시에 경자유전 원칙을 훼손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보다 강력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정부가 주목하는 부분은 무단 휴경과 불법 임대차다.

농지를 취득할 당시에는 직접 농사를 짓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방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 경작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부는 위반 사실이 확인될 경우 처분명령과 이행강제금 부과 등 강도 높은 조치도 검토하고 있다.

정부는 전수조사 결과를 토대로 처분명령 절차를 강화하고 신고 포상금 확대, 농지보전부담금 현실화 등 후속 제도 개선도 함께 추진할 방침이다. 매각명령이 내려져도 실제 처분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이어져 온 만큼 처분명령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 대상에 포함됐다.

전수조사에 대한 우려가 높아진 만큼 최근 농업계와 학계 일각에서는 ‘경자유전’ 대신 ‘경자용전(耕者用田)’이라는 개념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농지를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실제로 농업에 이용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농지를 반드시 농민이 소유해야 한다는 원칙보다 농지가 농업 생산에 활용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경우도 고령화와 농업 인구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농지 임대차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해 왔다. 고령 농민이 농지를 임대하고 청년농이나 기업농이 장기간 경작할 수 있도록 하면서 농지 이용 효율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률적 규제
우려 목소리

한 전문가는 “투기 목적 농지와 농촌 현실 속에서 발생한 비자경 농지를 동일한 기준으로 바라보기는 어렵다”며 “전수조사를 통해 불법 행위를 바로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령농의 은퇴와 농지 승계, 청년농의 농지 확보 문제까지 함께 풀 수 있는 종합적인 농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imsharp@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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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단독]‘이태리 석유 재벌 행세’ 이상한 경찰 수사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광주에서 일어난 ‘장윤기 사건 증거인멸’ 논란으로 경찰 조직이 시험대에 올랐다. 피의자 가족이 나서서 증거를 없애고 이 과정에 주변 경찰이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이 사건으로 검찰청 해체 이후 수사 권력을 한 손에 쥘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 한 여고생이 일면식도 없던 남자에게 살해됐다. 여학생을 구하려던 남학생은 크게 다쳤다. 경찰이 범인을 검거했고 사건의 심각성에 따라 얼굴을 공개했다. 생떼 같은 10대 여고생의 황망한 죽음에 국민은 경악했다. 하지만 국민이 더 분노한 지점은 따로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비위 의혹은 경찰 조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조직 명운 달렸다 장윤기 사건에서 수사 기밀 유출, 증거인멸, 초동수사 부실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장윤기의 혐의를 경찰이 나서서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경찰은 장윤기에게 강간·살인이 아닌 일반 살인 혐의를 적용했다. 이 과정에서 형량이 더 높은 강간·살인 혐의를 입증할 케이블 타이 등의 증거를 경찰이 없앴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검찰의 보완수사로 드러났다. 현재 정치권은 해체될 검찰에 보완수사권을 남겨둘지를 두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심지어 여권에서도 입장이 엇갈린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의 보완수사로 경찰의 부실 수사 문제가 확인되면서 권력을 한쪽에만 과도하게 몰아줘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부상하고 있다. 홍석기 국가수사본부장이 장윤기 사건에서 드러난 경찰 유착 의혹을 두고 “명운을 걸고 수사하겠다”고 말한 것은 조직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최대한 불식하겠다는 의도도 담겼다는 게 중론이다. 안 그래도 검찰청 해체로 수사 공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 이번 일로 그동안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경찰 수사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2023년 8월 공동대표였던 하모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소한 R스타트업의 이모 대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대표는 하씨가 회사를 그만둔 이후 단독대표가 돼 R스타트업을 떠안았다(<일요시사> 1493호 ‘<단독>스타트업 대표 1000억대 역외탈세 의혹’). 앞서 두 사람이 공동대표일 무렵 R스타트업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마스크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에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있던 때였다. 하씨는 마스크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했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필리핀의 법인을 이용해 수급하겠다고 했다. 미국의 한 회사와 판매 계약까지 체결하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사업은 ‘마스크를 수급할 수 없게 됐다’는 하씨의 말에 흐지부지됐다. 이후 마스크 관련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고 하씨는 R스타트업을 떠났다. 2022년 3월경에는 서로 연락도 끊겼다. 하씨의 회사 이메일 계정도 이 시기에 정지 조처됐다. 회사와도, 사적으로도 이 대표와 하씨의 관계가 끝난 것이다. 상황은 2023년 6월 이 대표가 하씨의 이메일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하며 반전됐다. 장윤기 사건으로 신뢰 바닥 새로운 자료 찾아도 시큰둥 이 대표는 하씨의 이메일을 통해 흐지부지된 줄 알았던 마스크 사업이 몰래 진행됐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씨가 가족과 지인을 동원해 마스크를 수급하고 수출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사실도 이 시기에 알게 됐다.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인천 연수경찰서에 고소하기에 이른다. 연수경찰서는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를 1000억원대로 판단했고 수사를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계로 넘겼다. 이 대표에 따르면 당시 연수경찰서에서 추정한 하씨의 마스크 거래 규모는 1400억원에 달한다. 이 대표는 “하씨는 회사(R스타트업) 메일 계정을 이용해 마스크 거래를 진행했다. 그사이 회사에는 일언반구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 대표를 더욱 화나게 한 건 경찰의 태도였다. 처음 사건을 맡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미진한 수사 태도로 이 대표의 불만을 샀다. 이 대표는 “하씨가 한국에 있지도 않은데 출국금지를 걸지를 않나, 경제범죄를 수사하면서 CFO가 뭐냐고 묻질 않나, 이렇게 많은 양의 자료를 제출했는데 고소인 조사를 20분밖에 하질 않나, 수사 자체가 엉망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2024년 2월 말 하씨를 불송치 처분했다. 하지만 인천지방검찰청(이하 인천지검)의 판단은 달랐다. 인천지검은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수사를 통해 하씨와 가족의 해외 계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찰의 불송치에 대해 보완수사를 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때가 2024년 3월이다. 경찰 수사에 답답함을 느낀 이 대표는 하씨와 관련된 자료를 이 잡듯이 뒤졌다고 한다. 특히 하씨의 회사 계정으로 오간 이메일을 꼼꼼히 살폈다. 그 결과 하씨가 카카오뱅크를 통해 6개월 동안 거래한 내역을 찾아냈다. 이 대표는 거래 내역에서 가족으로 추정되는 인물과 돈이 여러 차례 오간 것을 발견했다. 이 대표는 “2024년 5월에 거래 내역을 발견해 바로 경찰에 전달했다. 경찰이 나를 조사에 부른 건 (그해) 8월경이었는데 그때까지 거래 내역에 대한 어떤 수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보다 제대로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수사 권한도 없는 일반인이 이 정도로 자료를 찾아 건넸으면 좀 들여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반 국민은 경찰보다 계좌 접근 권한이 제한돼있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다. 고소 이후 3년 지나 하씨와 그 가족의 필리핀 계좌를 보기 위한 국제 공조에도 시간이 지체됐다고 토로했다. 검찰에서 보완수사를 요구한 때가 2024년 3월29일이었는데 그해 7월에서야 공조 요청을 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처음 고소인 조사를 받을 때부터 필리핀 법인 이야기를 숱하게 했다. 필리핀 법인에 보낸 은행 송금증, 해당 필리핀 법인이 운영하는 SNS 내용, 현지 언론 기사까지 제출했을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보완수사가 떨어지고 나서야 공조를 진행하면 기다리는 고소인은 답답해서 죽는다”고 말했다. 하씨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써준 사실확인서도 문제로 지적했다. 이 대표는 “해당 인물이 사실확인서를 써준 이후에 하씨와 함께 사업한 의혹이 있다. 이런 사람이 써준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있나. 경찰 조사에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진술했는데 ‘고소인은 ○○○의 사실확인서를 믿을 수 없음’ 이렇게 한 줄만 적었더라. 근거를 가지고 말했는데 경찰은 나를 ‘우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대표가 경찰에 제출한 자료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하씨를 불송치 처분할 때 근거가 됐던 내용을 다시 들여다볼 여지가 생겼다는 점이다. 당시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는 불송치 이유로 ▲(하씨가) 거래대금을 몰래 착복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고 ▲실제 거래가 성사된 사실이 없다면서 배임 혐의를 부인한 점 등을 들었다. 이때 ▲미국 A사와의 거래 과정에서 필리핀 법인을 사용하기로 합의한 점 ▲미국 A사 측의 거래 취소 요청 이메일 ▲계약 관련자의 사실확인서 등을 ‘혐의없음’의 근거로 제시했다. 즉, 경찰은 하씨가 마스크 사업을 진행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마스크 사업으로 수익을 본 것도 없고 그러니 배임 혐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 이 대표는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은 마스크 사업 과정에서 돈이 오간 흔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고, 사실확인서 역시 동업 관계에서 나왔기에 그 배경을 더 들여다봐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 자료만 제대로 봤어도 수사가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한다. 경찰의 결론 자체를 뒤집는 자료 아닌가”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특히 지난해 1월 이 대표는 하씨의 카카오뱅크 거래 내역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의 정체를 밝혀내기에 이른다. 하씨가 마스크를 수출하는 과정에서 수급을 담당한 업체가 있는데, 그곳의 대표와 이름이 같았던 것이다. “확인해 달라” 호소에도… 또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하씨가 2억4000만원에 이르는 신용 미수 거래를 한 내역도 찾아냈다.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했다는 뜻이다. 이 대표는 “신용 미수 거래금이 2억원이 넘는다는 건 담보 제공 현금이 1억5000만원 이상 있다는 의미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마스크 사장 이름을 알아낸 것도 그렇다. 대단한 기술을 쓴 것도 아니고 거래 내역에 있는 사람 이름과 다른 단어를 인터넷에서 조합해 검색했더니 내용이 나왔다. 이건 내가 다 수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의 적극적인 행보에도 경찰은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1계에서 2계로 수사팀을 한 차례 바꾼 것 빼고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해 4월30일 ‘수사 중지’를 결정했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이 대표는 하씨의 거주지 주소가 바뀐 것을 지적하면서 ‘이송’을 요청했지만 ‘보완수사 중에는 관할지 이송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후 수사는 1년 넘게 멈춘 상태다. 이 대표는 국세청에도 관련 내용을 제보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국세청에 같은 자료를 냈는데 국세청은 조사를 진행한 뒤 하씨가 ‘탈세를 한 게 맞다’는 취지로 답했다. 하지만 경찰에 그 사실을 알리자 ‘국세청 관계자와 통화했는데 사건과 관련 없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국세청에 확인했더니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는 말이 돌아왔다. 왜 거짓말까지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문제는 그사이 하씨가 다른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9~10월경 가상자산 전문 매체 기사에서 하씨의 영어 이름을 발견했다. 하씨가 ‘키키캣 코인’이라는 걸 만들었는데 이게 사기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하씨가 코인사업을 하면서 ‘이태리 석유 재벌의 아들’인 척했다는 글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불송치했다 보완수사 결정 “그건 1계에서 처분한 것” 이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하씨는 업무상 배임 혐의로 수사를 받는 도중에 또 다른 사기 행각을 벌였다는 뜻이 된다. 이 대표는 “(키키캣 코인의) 시가총액이 1억달러까지 올랐다가 현재 100만달러까지 떨어진 걸로 안다. 키키캣 코인을 구매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는데, 지금은 피해자 방이나 다름 없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중지된 수사를 재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최근에는 하씨의 여동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페이퍼컴퍼니를 운영한 사실도 발견했다. 그는 “하씨와 거래한 마스크 제조업체는 여러 곳인데 수출을 진행한 곳은 하씨 동생 명의의 페이퍼컴퍼니로 확인된다”며 “이 내용을 근거로 수사를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경찰은) ‘규정 위반’이라고 윽박질렀다”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 규칙 제102조(수사 중지 사건 수사 재개)는 ‘경찰은 수사 중지된 사건의 피의자를 발견하는 등 수사 중지 사유가 해소된 때에는 …(중략)… 즉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경찰과 이 대표의 주장이 엇갈린다. 경찰은 수사 재개에 필요한 요건을 국제 공조 수사 결과라고 말했다. 반면 이 대표는 새로운 증거가 나왔는데 왜 수사를 재개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이 대표는 “필리핀과의 국제 공조 결과가 아직 회신되지 않았다는 건 하씨의 해외 (계좌) 자료가 필요한 일부 수사에 제약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하씨의 마스크 사업 규모를 확인하는 정도에 필요한 자료”라며 “하씨의 여동생이 페이퍼컴퍼니를 갖고 있다는 의혹은 수사가 시작된 이후 3년여 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내용이다. 수사를 재개하고 관련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다시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인천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2계 담당자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올 때까지 수사를 재개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씨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언제쯤 올 것으로 예상되냐는 질문에도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또 앞서 하씨를 불송치한 내용에 대해 거론했을 때는 “그 부분은 1계에서 처분한 것”이라며 “우리(2계)는 검찰의 보완수사 요청 이후 수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소인이 제출한 자료는 경찰 수사 규칙에 따라 사건 기록에 편철해 놨다”며 “국제 공조 수사 결과가 없어도 수사를 재개할 수 있는지 국수본(국가수사본부)에 질의해 둔 상태”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수사가 길어지는 사이 하씨가 또 다른 일을 벌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범죄 혐의가 확인되지 않은 부분 아닌가. 피고소인이 현재 받는 업무상 배임 혐의 외의 별건 수사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이 대표가 담당 수사관에게 언급한 하씨의 코인 사업 관련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