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찜찜한 압승’ 막전막후

이기고도 웃지 못한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6·3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전국 광역단체 16곳 중 12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동시에 진행된 14곳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9곳을 차지했다. 숫자로만 따지면 압승이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도부가 마음 편히 웃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명정부 1년차에 치러진 6·3 지방선거가 막을 내렸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혼잡하게 뒤섞인 탓에 투표함을 열기 직전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다. 국민의 관심도가 높아진 만큼 투표 결과 또한 밤새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주요 격전지서 순위가 역전될 때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의 탄식도 깊어졌다.

너무 높은
5선의 벽

가장 중요한 서울을 탈환하지 못했다는 점이 뼈아프다. 그동안 민주당은 서울을 지방선거 승리의 지표로 삼은 만큼 적잖은 타격을 받았다.

지난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따르면 국민의힘 오세훈 당선인은 이날 오전 9시30분 개표율 97.7% 기준 48.94%를 얻어 48.34%를 득표한 민주당 정원오 후보를 0.6%p 차이로 앞서며 승리를 확정했다. 개표 막판까지 접전을 다툰 끝에 오 당선인이 3만359표 차이로 정 후보를 따돌렸다.

앞서 발표된 지상파 방송 3사 출구조사 결과가 완전히 뒤집힌 순간이었다. 당시 오 당선인이 46.0%로 정 후보(51.4%)에게 오차범위 밖에서 뒤처지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정을 넘기자 두 사람의 격차가 빠르게 좁혀졌고 결국 민주당의 패배로 끝났다.

정 후보는 “시민 여러분의 선택을 무겁고 겸허히 받들겠다”며 패배 승복 선언을 했다. 그는 “제가 부족했다. 모든 것이 제 탓”이라며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고 더 깊이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더 넓게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정 후보는 “저를 믿고 함께해 준 시민 여러분, 선거운동원과 자원봉사자, 캠프 관계자, 당원들에게, 기대에 보답하지 못해 송구하다. 함께 경쟁해 주신 후보들께 감사드린다. 당선되신 오세훈 후보께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고 아쉬워했다.

정치권에서는 정 후보가 보수 후보와 차별화를 두지 않았던 점 등을 패배 원인으로 지목했다. GTX 철근 문제 등 안전 문제를 부각시켰으나 서울 민심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부동산 관련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권 프리미엄을 앞세울 수 있었으나 정책 면에서 아쉬웠다는 반응이 나오는 만큼 “여권 프리미엄과 명픽(이재명픽)에 기대 안일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인지도 싸움에서 밀렸다는 분석도 나온다. 토론을 회피하는 등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 탓에 유권자로서는 ‘검증된’ 오 시장에게 한 표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지난 4년 ‘오세훈의 서울’을 심판하는 심판론에서는 유리했으나 경험과 인지도를 모두 충족한 오 당선인을 상대하기엔 부족했을 것이란 해석이다.

서울·대구·부산까지 몽땅 내줬다
될 것 같던 ‘이곳’서 낙마 이유는?

그동안 오 당선인은 정 후보를 “오직 대통령 후광에 기대 선거를 치르는 후보”라고 규정하며 “1000만 시민의 삶과 직결된 시장의 자리를 감당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오 당선인은 토론을 거부하는 정 후보를 겨냥해 “검증의 장을 만들지 못한 정 후보는 준비 안 된 초보 운전자”라며 “서울시를 연습 코스로 만들어드릴 수 없다”고 했다. 아울러 “국민께 전달 드릴 수 있었던 선거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나 목표, 서울시에 대한 비전을 전달하는 데 완벽하게 실패했다고 평가한다”고도 말했다.

이런 결과는 정 후보를 서울시장 선거판으로 이끈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부담이 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지도부 역시 주요 격전지인 서울을 뺏긴 만큼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 조승래 중앙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은 서울시장 선거 패배 원인에 대해 “오세훈 당선인이 5선에 도전하는 사람이니 인지도 측면에서 그런 상황이 있을 것 같다”며 “서울시의 인구 구성의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측면들을 봤을 때 실제 이 선거는 갈수록 접전 양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부겸 바람’이 몰아쳤던 대구도 결국 국민의힘 쪽으로 돌아섰다. 개표 결과 김부겸 후보는 45.05%를 득표해 53.92%를 득표한 국민의힘 추경호 후보에게 패배했다. ‘보수의 심장’인 대구인 만큼 막판에 결집한 ‘샤이 보수’ 현상이 ‘샤이 부겸’을 이긴 것이다.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 교통정리가 한창일 때 민주당은 일찌감치 김 후보를 앞세웠다. “파란색 동남풍이 분다”는 말이 나올 만큼 김 후보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렸고, 최초의 민주당 출신 대구시장이 탄생할지 여부에 이목이 쏠렸다.

김 후보는 정치색을 최소화하고 ‘대구 부흥’에 초점을 맞춰 TK(대구·경북) 맞춤형 선거운동을 이어갔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스타벅스 논란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여권에서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이 이어진 것에 대해서도 “이제 이 정도 선에서 그쳤으면 한다”며 민주당 지도부와 거리를 뒀다.

공천 전쟁 끝에 국민의힘에서 추경호 후보가 김 후보의 대항마로 나섰고 갈 곳 없던 보수 민심이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재명정부가 모든 권력을 장악하려는 오만한 정권”이라며 민주당 견제론을 띄웠고 여당이 발의한 조작기소 특검법이 결정타를 날리면서 보수 결집은 갈수록 끈끈해졌다.

보수 텃밭
‘졋잘싸’

결국 김 후보는 대구의 벽을 넘지 못했다. 조작기소 특검법 발의와 맞물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원 유세가 보수 표심을 자극했다는 게 주요 원인이다. 김 후보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 선거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승복한다. 믿어주시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께 죄송하다”며 심경을 밝혔다.

“저 개인의 패배이지 변화를 열망하는 대구 시민의 패배가 아니다. 좌절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는 김 후보는 “대구의 경쟁이 벌어지고 여야가 서로 시민께 잘 보이려는 노력을 하는 서비스로의 정치의 가능성을 우리는 봤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부산 북구갑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정청래 대표가 호명하고 이재명 대통령이 띄운 하정우 후보가 41.26%를 득표해 42.96%를 얻은 무소속 한동훈 후보에게 석패한 것이다. 북구갑은 민주당 전재수 의원이 3번 낙선 끝에 당선된 뒤 내리 3선을 지낸 곳으로 부산의 유일한 민주당 지역구였지만 하 후보의 패배로 그간의 맥이 끊기게 됐다.

‘급하게 투입된 정치 신인’이라는 꼬리표를 잘라내지 못한 것이 패배 원인으로 지목된다.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부산에 전략적으로 투입된 만큼 지역 현안과 유권자와의 스킨십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출마 선언 직후 벌어진 ‘손털기 논란’과 ‘오빠 논란’이 연달아 불거지면서 유권자로부터 호감을 얻지 못한다는 측면도 있다.

패배 직후 하 후보는 “이번 보궐선거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고개를 숙였다. 하 후보는 앞서 발표한 지역 공약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이번 선거 과정에서 제가 강조했던 ‘AI 교육 1번지’ ‘서부산 AI 테마밸리’ 구상은 우리 북구가 나아가야 할 필연적인 방향이라고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주민 여러분의 마음을 온전히 얻기에는 저의 노력과 준비가 부족했음을 인정한다”며 “보내주신 따끔한 질책과 격려 모두 저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겠다”고 덧붙였다.

민주당-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의 혈투가 벌어졌던 경기 평택을에는 국민의힘 유의동 후보가 승기를 꽂았다. 이곳에서의 득표율은 유의동 당선인 34.59%, 민주당 김용남 후보 28.99%, 혁신당 조국 후보 27.44%로 집계됐다. 뜻밖의 결과에 김 후보와 조 후보 모두 적잖게 당황한 모양새다.

본전도
못 찾았다

두 사람은 선거를 치르기 직전까지 서로를 겨냥해 “네거티브(흑색선전)를 하지 말라”며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다. 김 후보는 조 후보를 ‘민주당을 참칭하는 후보’라고 날을 세웠고 조 후보는 ‘대부업체 의혹’으로 받아치면서 선거는 진흙탕으로 빨려 들어갔다.

단일화가 불발되면서 결국 민주 진영 표가 갈라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범야권 표심이 두 갈래로 흩어졌고, 선거 기간 동안 반복된 의미 없는 소모전에 평택 유권자들이 돌아섰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기싸움을 이어갔다. 김 후보는 “다음엔 더 좋은 후보가 깨끗한 선거로 이기기를 바란다. 네거티브 없는 깨끗한 선거에 성공했더라면 우리나라 정치 풍토가 바뀌는 계기가 됐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며 조 후보를 겨냥하는 듯한 말을 했다.

또 혁신당의 선거운동 기조인 ‘국힘 제로(0)’를 언급하며 “이번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는 평택을 포함해 국힘 제로는 안 되는 것 같다. 대단히 아쉽다”고 되돌아봤다.

조 후보는 “범진보 진영을 지지하신 국민들께 크나큰 실망과 아픔을 드렸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국민주권정부 성공이라는 바다를 향해, 지치지 않고 함께 흘러가야 한다”며 “연대와 통합 정치는 절실하다. 함께 손잡고 전진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혁신당 관계자는 “조 후보는 계속해서 도전할 것이고, 그 장소는 평택을이 될 것”이라며 차기 총선에 출마 가능성을 시사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혁신당의 훼방으로 소중한 한 석을 국민의힘에 빼앗긴 셈이다. 두 당은 한 차례 합당이 무산됐던 만큼 ‘평택’이라는 강을 가운데에 둔 채 감정의 골이 깊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김 후보의 낙선이 민주당 계파 갈등의 도화선이 될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민주 진영의 대표 스피커인 김어준씨는 방송을 통해 “평택을 선거구의 김용남 공천 갈등을 이번 선거의 결정적 패착”이라며 김 후보의 공천을 결정한 정청래 대표의 책임론으로 몰아갔다.

서로 헐뜯다 끝나버린 평택을
정 대표 위기…전대 쟁점될까

그는 정 대표를 겨냥해 “제가 보기에 출발점은 민주당과 혁신당의 합당 실패”라며 “그때 합당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평택을 같은 선거구가 아예 안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평택을 같은 곳에서는 내란을 함께 극복했던 동지와 ‘이렇게까지 싸워야 하나’ 싶은 갈등을 겪게 되니까 상대를 반드시 이겨야겠다는 승부욕 대신에 마음이 흩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인천 연수갑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송영길 전 대표도 참전했다. 그는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서 “(지도부에) 당력을 평택에 집중하라고 강조했다”며 “평택에 우리 당력이 집중됐으면 질 수가 없는 선거인데 져버렸다. 참 아쉬운 점이 크다”고 말했다.

송 전 대표는 “(정청래) 지도부 책임을 따질 것도 없이 바로 전당대회가 있어서, 리더십이 평가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다른 라디오를 통해서는 “당 지도부가 혁신당을 짝사랑하면서 당의 정체성과 중심을 정확히 세우지 않고 애매한 상태로 통합 논쟁에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평택 패배에 대한 지도부 책임을 물었다.

이에 조승래 본부장은 “당연히 선거의 모든 책임은 대표를 포함해서 지도부가 지는 것”이라면서도 송 전 대표를 겨냥했다. 그는 “이번 선거 과정에서 당의 일치된 캠페인을 때로는 방해했던 여러 얘기가 있었다”며 “그게 선거를 어렵게 한 측면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선거 이후 이런저런 평가는 충분히 할 수 있는데 과정에 있었던 발언에 대해선 그 발언을 했던 분들이 ‘내가 당의 승리를 위해 기여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판단해 보시라”며 “때로는 자숙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한병도 원내대표는 이번 6·3 지방선거 결과에 대해 “민의를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밝혔다. 서울 등 주요 격전지를 탈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민심 앞에 더 겸손하라는 질책, 신속하게 민생을 개선해 내라는 국민의 준엄한 명령 또한 무거운 과제로 주어졌다”고 말했다.

한 원내대표는 “민주당은 민심을 오롯이 받들겠다. 더 낮은 자세로 국민의 삶을 살피고, 한 분 한 분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겠다”며 “민주당에 뼈아픈 쓴소리를 아끼지 않은 국민의 목소리도 가슴 깊이 새기고, 더 유능한 민생 정당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만했나…
고개 숙이다

정 대표도 “6·3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민주당에 큰 승리를 안겨주신 국민께 깊이 감사드린다. 다만 서울을 탈환하지 못해 아프다”고 심정을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 과정에서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와 응원, 따끔한 경고와 질책까지 전부 다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들겠다. 국민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대한민국 국가 정상화, 일 잘하는 지방정부로 보답하겠다. 당정청이 원팀·원보이스로 뭉쳐 민주당은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든든하게 뒷받침하겠다”며 “당원 주권 경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준 당원들께도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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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믿음이죠”라고. 피해자들은 2년여 동안 수십억원을 뜯기면서도 차용증은 물론 사업계획서 같은 문서 한 장 보지 못했다. 그나마 명함에도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서울의 한 보험사 소회의실. 처음에 3명이던 피해자가 2시간 뒤 1명 더해져 총 4명이 됐다. 몇 명은 과거 학습지 회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몇 명은 현재 보험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의 접점은 최모씨라는 한 여자였다. 이들 모두 최씨를 만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뜯겼다. 4명에게서만 20억원 가까운 돈이 흘러나갔다. 클래식한 사기 수법 최씨의 사기 행각은 광범위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헬스케어 제품 판매 직원 등 각각의 피해자 그룹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느낄 때쯤에서야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피해자 수가 70~80명, 피해액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 대략적인 수치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한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씨의 정체는 모호했다. 최씨가 일부 피해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기업/개인 세금 처리 대행’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한 피해자는 “최씨는 기업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세무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계속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을 세무 관련 전문직으로, 배우자는 외교관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명품 옷, 외제 차 등은 최씨를 ‘돈 많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용했다. 실제 최씨를 만났던 몇몇 피해자들은 ‘(집에) 가정부가 있었다’ ‘가정부에게 LA 갈비 세트를 줬다’ ‘(최씨와 그 가족이) 블랙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급 카페에서 비싼 디저트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씨의 배경에 흔들리던 피해자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드는 데는 건 주변 동료, 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한 동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말에 피해자들은 최씨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질릴 정도로 권했다.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피해자가 대부분 ‘여초 직장’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파악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학습지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보험사로 같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몇몇이 최씨와 얽히면서 지인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판이 커졌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불법 다단계’ 방식이다. 한 변호사는 “굉장히 클래식한 방식의 사기”라고 표현했다. 최씨의 배경과 언행, 동료와 지인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그때부터 홀린 듯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간단했다. ‘(돈을) 일주일 쓰는 대신 이자를 1% 주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일주일 동안 빌려주면 이자로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피해자는 일주일 뒤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100만원을 받게 된다. 한 피해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예 선이자를 떼고 빌려 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1억원이면 9900만원만 빌려주는 식으로, 원금을 돌려받으면 100만원을 번 셈이 된다. 한남동 아파트 ‘상류층’ 행세 동료, 지인 부추김에 거액 투자 처음 한두번은 이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금이 들어와야 할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이자까지 끊겼다. 원금과 이자를 달라는 요구에 최씨는 이자 비율을 높이면서 추가로 돈을 넣으라고 권했다. ‘돈을 더 넣으면 이자로 10%를 주겠다’는 식이다. 피해자마다 이자 비율은 달랐지만 대략 5~10%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해 주면 월 수수료로 0.8%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최씨의 말대로라면 카드로 100만원을 긁었을 때 수수료로 8000원이 발생한다. 당연히 카드 결제액이 커질수록 수수료도 많아진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카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몇몇은 카드를 새로 발급까지 받아 최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결말은 같았다. 카드 대금은 쌓여가고 수수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한도 때문에 사용이 막히니까 리볼빙을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루는 서비스다. 당장 변제 부담은 덜하지만 잔액에 연이자가 15~19%가량 붙는다. 눈 깜짝할 새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상품이다. 이자나 수수료는커녕 원금도 못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피해자들은 결국 최씨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보험설계사 등 피해자 7명은 지난해 12월 최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해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 등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7명 외에도 피해자가 3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 5명은 주범 최씨, 모집책 차모씨, 이모씨, 박모씨, 그 외 김모씨 등이다. 피해자 7명과 접점이 가장 적은 김씨를 제외하고 4명의 피고소인만 놓고 보면 역학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차씨와 이씨, 박씨 등이 최씨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7명의 피해액은 26억8700만원에 달한다. 나머지 피해자 3명의 피해액까지 합치면 28억8000만원으로 불어난다. 이들은 계좌이체, 카드 결제 등의 방법으로 최씨 등에게 돈을 보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1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가운데서도 A씨의 피해액은 확인된 것만 약 17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7명의 전체 피해액(27억원) 중에 63%가 A씨의 몫인 셈이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이자 비용은 별도다. 이 돈까지 합치면 A씨의 피해액은 약 23억원까지 늘어난다. A씨는 차씨를 통해 최씨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보험사에서 5년간 동료로 지냈다. 홀린 듯이 돈 보냈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었다. 그는 “죽도록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2024년 초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라’는 차씨의 부름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A씨는 인근의 카페에서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최씨를 만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차씨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A씨는 “처음 만난 최씨는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차씨는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차씨가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원금은 보장된다. 나도 2억을 벌었고 두 달 뒤에 추가로 1억을 번다’고 말하니 솔깃했다. 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차씨가 신나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차씨는 A씨에게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기도 했다. 카드 결제, 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최씨에게 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2024년 4월경부터다. A씨의 카드는 2024년 4월부터 8월, 지난해 2월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래처는 정유사, 명품관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동차 기름값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 주유 대금으로 결제됐다는 점이다. 2024년 4월, A씨의 카드가 처음 사용된 날짜에 ‘○○석유’라는 곳에서 1200만원이 결제됐다. 이후에도 1000만원 단위의 돈이 ‘○○상사’ ‘○○○ 에너지’ 등에서 사용됐다. 카드로 긁어놓고 이후에 현금으로 되돌려받는 ‘카드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최씨는 명품관에서도 총 7700만원을 긁었다. 이렇게 결제된 카드 대금은 3억6000만원에 달한다. 카드 대금과 수수료를 주겠다는 최씨의 말은 ‘공수표’였다. A씨는 “카드를 빌려준 쪽에서 돈을 넣어달라고 오히려 빌어야 했다. 몇 번을 요구해야 한번 돈을 넣어줄까, 말까였다. 한도가 막히면 다른 카드를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쳐 최씨로부터 입금된 돈은 2억원. 원금과 주기로 한 수수료를 계산하면 턱없는 돈이다. 결국 A씨는 카드 대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뜯겼다. ‘짧게 쓰고 줄게’라며 빌려 간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은 최씨가 이자 명목의 돈을 주지 못한 시기를 2024년경으로 기억했다. A씨 역시 2024년 4월에 처음 돈을 넣고 한 달 뒤부터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회사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돈이 묶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도 죽었나 ‘돈만 들어오면 A씨부터 챙겨줄게’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A씨가 매달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돈을 넣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A씨를 지배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번만 빌려주면’ ‘곧 돈이 들어온다’는 최씨의 말에 속아 A씨가 빌려준 돈은 15억5000만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이 전부 A씨 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A씨는 “동생, 부모님, 지인, 심지어 고객에게까지 돈을 빌렸다”고 털어놨다. 이 중 3억원가량은 집을 담보로 제3금융권에서 빌린 돈으로 즉, 사채다. 급하게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제시한 높은 이자율은 A씨의 목을 옥죄고 있다. A씨는 지금도 그 이자를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악랄한 수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최씨는 A씨가 보험설계사인 점을 이용해 그의 고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연결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대납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갚겠다며 A씨를 이용한 것이다. A씨는 해당 고객이 최씨와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 400만원이 넘는 보험을 2개 가입한 고객은 10개월 정도 보험료를 낸 뒤 사라졌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을 유치하면 전체 납입 기간에 대한 선수수료로 익월에 월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월 100만원, 20년 납기 보험을 든다고 하면 총 보험료 2억4000만원에 대한 수수료가 보험설계사의 몫이다. 능력에 따라 보험설계사의 연봉이 천차만별로 차이 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있다. 고객이 최소 25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설계사가 받은 월급은 ‘환수’ 조처된다. 보험설계사의 능력은 신규 고객 유치가 아니라 유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가까이 단 한 건의 환수 조처도 없던 A씨의 경력은 최씨로 인해 무너졌다. A씨의 동료이면서 피해자인 이들 역시 최씨, 차씨 등이 연결해준 고객이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환수 조처로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씨에게 넘어간 1억5000만원은 결정타였다. 그전까지 약 10개월간 돈을 보내지 않고 빚 독촉만 했던 A씨는 최씨에게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A씨에 따르면 최씨는 수표 다발이 찍힌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 1억5000만원의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1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돈 못 빌려주면 카드라도 내놔 주범 최씨 다른 사건으로 재판 5000만원만 마련해 갔던 A씨는 그 자리에서 고객에게 1억원을 빌려 최씨에게 건넸다. A씨는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A씨) 때문에 450억원을 출금 못하게 생겼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윽박질렀다. 최씨도 나서서 ‘빨리 어디에서라도 빌려봐’라고 계속 압박했다. 정말 내 책임이 될 것 같은 마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1억50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뼈까지 발라 먹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A씨는 최씨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A씨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속을 수 있냐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A씨도 피해자들도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피고소인 가운데 1명인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역시 최씨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그걸로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되짚어 보면 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소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돈 욕심에 시작했다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하니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유준 법무법인 LKB평산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웅덩이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웅덩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다시 말해 투자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사업체 같은 실체가 아예 없었다. 즉, 최씨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기망할 의도로 만났고 피해자들을 끌어들인 피고소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A씨 등에게 받은 돈을 투자 목적이 아닌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피고소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몇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통화가 연결된 김씨는 “최씨는 고소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걔도 사업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여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걔도 사기 피해자”라며 “가족하고도 사이가 틀어졌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안다. 나는 (최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씨 사건은 크게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있고 A씨 등의 고소 사건도 비슷한 유형이라 검찰 송치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또 다른 보험사 지점, 헬스케어 제품 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도 피해자가 있다. 이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최씨를 비롯한 중간 모집책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피해 금액이 크기에 이들은 형량이 높은 ‘특경법’에 걸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 사건으로 2명이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상태다. 최씨와 피해자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큰돈을 투자했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피고소인들은 이 여성이 원래 우울증을 앓았고, 남성은 지병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추가 피해자 더 나올 듯 과거 사기 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 사건의 진짜 공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돈을 뜯겼던 피해자가 원금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다. 사기 사건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에 비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영혼이 다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일전에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