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몽키하우스’ 미군 위안부 수용소 (29)영업장 내 독재 철권통치

  • 김영권 작가 nammunsan@naver.com
  • 등록 2026.06.08 05:54:03
  • 호수 15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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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오히려 일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힘들 경우가 많았다.

지배인은 클럽 여주인의 8촌 오빠이자 정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는 쿠데타로 집권해 독재 철권통치를 계속하는 박 대통령을 위대한 영도자로 찬미하며, 자신도 그런 식으로 종업원들에게 권력을 휘둘렀다.

눈에 거슬리면 위협과 폭력을 다반사로 행사하는 한편 당근을 써서 구슬리기도 했다.

위대한 영도자

동두천 최대 수준인 블루문에서 쫓겨나면 다른 곳에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므로 다들 쉬쉬하며 참아 넘겼다.

청운은 자신이 무담시 욕설을 듣고 인격 모욕을 당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왠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처사를 받는 것 또한 마치 자기가 그런 더러운 토악질 앞에 선 듯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소개해 준 피에로 형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내가 죽는 건 겁나지 않지만, 그 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지.’

그러면서 씩 웃곤 했다. 어쨌든 자신이 말끔히 정돈한 자리에 새 손님이 앉아 가져다 준 술을 음미하며 뭔지 모를 얘기와 함께 미소 지을 땐 잠깐이나마 노동의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지옥의 구덩이는 있는 법이었다. 청운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은 주방에 들어설 때였다. 그것도 밤 11시가 넘어 손님도 대부분 눈맞은 여자와 함께 팔짱을 낀 채 사라지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미군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만 안주는 별로 대단한 걸 시키지 않기에 평소에도 주방은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었다.

스물 네댓 살쯤 돼 보이는 주방장은 지배인보다 더 심한 박통 숭배자이자 극단적인 친미주의자였다. 늘 걸치고 다니는 하얀 야구 모자와 티셔츠엔 양키 팀 마크와 미국 성조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한 번씩 꼭 미친 듯이 미국과 미군을 향해 욕을 퍼붇곤 했다. 그럴 때면 입가엔 허연 침거품이 풀풀 생겨났다.

물론 자신의 아방궁인 작은 주방에서 소리는 잔뜩 억누르고 증오심은 펄펄 끓이며 쥐새끼처럼 내는 소음이라 바깥에 들키진 않았지만 과연 그가 친미주의자인지 미친 녀석인지 종잡을 길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곱슬머리에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한 것을 보면 조금쯤 트기 같기도 한데 본인은 파마 머리라고 주장한다.

혹시 미군 아비가 어린애에게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다가 상처와 배신감만 남긴 채 아메리카로 줄행랑쳐 버린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장은 불그죽죽한 입술 새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개새끼. 암캐 엉덩이나 쫒아다니는 양키 놈들. 흥, 그래봤자 흰둥이나 검둥이나 결국 같은 짐승일 뿐이야. 킬킬.”
청운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어이, 너무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좀 쉬라구.”

아마도 또 찬장 속에 숨겨둔 시바스 리갈을 이따금 꺼내 찔끔찔끔 마신 모양이었다. 지배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놈이 청운에겐 마치 주방이라는 소궁궐의 왕처럼 군다.

“씨발, 인생이 도대체 뭐야?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왜 막느냔 말이야, 응? 내가 뭐 아주 대단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닌데 말씀이야. 낄낄, 대체 넌 무슨 재미로 사는지 꽤 궁금해. 인생엔 목적이 있어야지, 낄낄.”

“주방장 형은 그 뭐…이상스런 목표를 향해 잘 나가고 있나요?”

“후후, 그럼 오늘도 또 한 년 조질 거야. 야, 너도 한번 껴 볼래?”

청운은 씩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짜식, 꺼벙이 같으니.”

청운이 그동안 살펴본 그는 변태성이 농후했다. 미식가에다 찰나적인 향락주의자로 사는 건 자유라 치더라도, 여자들의 속옷을 훔쳐 냄새를 맡다가 갈기갈기 찢는다거나, 화장실 문 밑의 틈새로 상체를 잔뜩 구부린 채 훔쳐보며 악마적인 미소를 짓는 꼴을 보면 만정이 다 떨어졌다.

그의 원대한 목표는 평생 동안 여자를 1000명 이상 정복하는 것이었다.

그 실적을 표시하기 위해 자그마한 스크랩북에 공략한 여자의 음모를 한 올씩 수집해 넣고 관련 사항을 메모해 둔 것을 청운에게 비밀스레 보여 주며 자랑스레 낄낄거리기도 했다.

갑자기 기도 놈이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좆나게 배고프네. 형, 라면이나 하나 끓여 주슈.”

“얄마, 내가 니 종이냐? 쟤한테 고개 꾸벅 숙이고 부탁해 보렴.”

“쓰벌, 형이 약을 탔는지 이젠 중독돼서 형이 끓인 라면이 아니면 못 먹겠어.”

“미친 새끼.”

그러면서도 주방장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청운은 개수대에 쌓여 있는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형, 수고스럽지만 일단 면을 삶아서 국물을 버린 다음에 스프와 고추장을 넣어 좀 비벼 줘.”

“왜?”

“일단 그렇게 좀 해줘. 기름기가 몸에 안 좋다니까 뭐.”

종업원들에게 위협과 폭력
다들 쉬쉬하며 참아 넘겨

“조 새끼, 또 좆에 감기 걸렸구만. 야. 청운아, 잘 알아 둬라. 저런 놈은 삶을 요리해 먹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음부에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청운은 대꾸하지 않고 설거지만 묵묵히 계속했다.

“형, 기뻐해. 오늘 밤 그년이 독수공방이라는 정보를 알아냈어.”

“음, 그런데 독종인데 잘 될까?”

“까짓것, 제 아무리 도도한 년이라도 주사 한 방이면 땡이지 뭘.”

“음, 헌데 난 잠든 공주를 그러긴 싫단 말야. 반항하다가 할딱거리는 맛이 있어야지. 흐흥.”

“이따, 그건 그때 가서 또 조치를 하면 되지 뭘 그래.”

“음, 하긴 맛난 걸 먹으려면 목숨이라도 걸고 모험을 해야겠지.”

“그럼, 닳고 닳은 일반 양갈보가 아니라 붕장어같이 싱싱한 댄서인걸.”

“근데 니 좆이 독감에 걸렸으니 난 사실 좀 꺼림칙해.”

“그게 뭔 대단한 걱정이야. 정 겁나면 형이 먼저 꽂으면 되잖아.”

“하긴 뭐 아무튼 감쪽같이 끝내야 해. 그런데 그년은 왜 하필 빨강색을 그렇게 좋아한다니?”

“정열적이고 좋은데, 왜?”

“두어 가지 의미가 있지. 열정뿐만 아니라 피와 살인….”

“걱정 마. 벗겨 놓으면 하얀 알몸뚱이가 한결 요염할 테니까.”

청운은 귀를 곤두세웠다. 놈들이 공모해서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성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떤 여인을 해치거나 죽이는….

그때 주방장이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날카로운 회칼을 마치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권총을 돌리는 듯 휘리릭 내돌린 후 청운의 복부에 갖다 댔다.

“만약 좀전에 한마디라도 들은 말이 있다면 잊어버리고, 없다면 아예 상상하지도 마. 까딱 씨부렸다간 확 쑤셔 버릴 테니까.”

놈은 눈알을 부라리며 입술로만 히죽 웃었다. 청운은 한숨을 쉬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기도 녀석과 주방장 놈은 미군들에겐 슬슬 기면서도 클럽의 동족인 종업원이나 여자들에겐 은근히 위세를 떨었는데, 그건 그들이 지배인의 조종을 받는 똘마니 정보원이기 때문이었다.

작별의 멜로디

디스크자키의 영업 종료 방송에 이어 작별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기도 놈이 휘파람을 불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청운은 재빨리 청소를 하는 한편 신경을 곤두세워 주방 쪽에 주의를 집중했다. 빈 접시와 컵을 들고 가 작은 구멍으로 밀어넣으면서 슬쩍 주방 안쪽을 살펴보니 두 놈은 노란 양주를 마시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놈들이 뭔지 쑥덕거리며 홀로 나오더니 바람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청운은 하던 일을 놓아두곤 곧장 뒤쫒았다. 며칠 전에 들어온 상철이란 얘한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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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단독] ‘기업 비자금’ 다단계에 털린 보험설계사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서 사라킴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눈을 가리는 건 거짓이 아니에요. 믿음이죠”라고. 피해자들은 2년여 동안 수십억원을 뜯기면서도 차용증은 물론 사업계획서 같은 문서 한 장 보지 못했다. 그나마 명함에도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그들의 눈을 가린 건 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믿었을까? 서울의 한 보험사 소회의실. 처음에 3명이던 피해자가 2시간 뒤 1명 더해져 총 4명이 됐다. 몇 명은 과거 학습지 회사에서 동료로 일했고, 몇 명은 현재 보험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의 접점은 최모씨라는 한 여자였다. 이들 모두 최씨를 만났고 한 명도 빠짐없이 돈을 뜯겼다. 4명에게서만 20억원 가까운 돈이 흘러나갔다. 클래식한 사기 수법 최씨의 사기 행각은 광범위하면서도 폐쇄적이었다.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헬스케어 제품 판매 직원 등 각각의 피해자 그룹이 있었지만 서로 알지 못했다. 이들은 ‘뭔가 이상하다’ 느낄 때쯤에서야 또 다른 피해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피해자 수가 70~80명, 피해액이 3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 대략적인 수치일 뿐,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한 피해자는 “본인이 피해자인지도 모르는 피해자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최씨의 정체는 모호했다. 최씨가 일부 피해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기업/개인 세금 처리 대행’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름, 전화번호만 적혀 있다. 한 피해자는 “최씨는 기업의 비자금을 관리하면서 세무 업무를 대행한다고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계속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상대에게 ‘사장님’ ‘회장님’이라고 말했다”고 설명했다. 최씨는 자신을 세무 관련 전문직으로, 배우자는 외교관이라고 소개했다. 서울 한남동의 고급 아파트, 명품 옷, 외제 차 등은 최씨를 ‘돈 많고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일종의 장치로 작용했다. 실제 최씨를 만났던 몇몇 피해자들은 ‘(집에) 가정부가 있었다’ ‘가정부에게 LA 갈비 세트를 줬다’ ‘(최씨와 그 가족이) 블랙카드를 사용하고 있었다’ ‘고급 카페에서 비싼 디저트를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등의 말을 하기도 했다. 최씨의 배경에 흔들리던 피해자를 완전히 넘어가게 만드는 데는 건 주변 동료, 지인의 부추김이 결정적이었다. 몇 년 동안 한 직장에서 근무한 동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지인의 말에 피해자들은 최씨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한 피해자는 “처음에는 내켜 하지 않던 사람이 있었는데 (중간에서) 질릴 정도로 권했다. 집까지 찾아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눈여겨볼 대목은 피해자가 대부분 ‘여초 직장’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요시사>가 파악한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학습지 회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보험사로 같이 넘어왔다. 이 과정에서 몇몇이 최씨와 얽히면서 지인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판이 커졌다. 전형적인 ‘피라미드’ ‘불법 다단계’ 방식이다. 한 변호사는 “굉장히 클래식한 방식의 사기”라고 표현했다. 최씨의 배경과 언행, 동료와 지인의 꼬드김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그때부터 홀린 듯이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사기 수법은 간단했다. ‘(돈을) 일주일 쓰는 대신 이자를 1% 주겠다.’ 예를 들어 1억원을 일주일 동안 빌려주면 이자로 100만원을 주겠다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피해자는 일주일 뒤 원금과 이자를 합해 1억100만원을 받게 된다. 한 피해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예 선이자를 떼고 빌려 갔다고 한다. 다시 말해 1억원이면 9900만원만 빌려주는 식으로, 원금을 돌려받으면 100만원을 번 셈이 된다. 한남동 아파트 ‘상류층’ 행세 동료, 지인 부추김에 거액 투자 처음 한두번은 이자가 들어왔다. 하지만 원금이 들어와야 할 시기가 늦어지기 시작하더니 이후 이자까지 끊겼다. 원금과 이자를 달라는 요구에 최씨는 이자 비율을 높이면서 추가로 돈을 넣으라고 권했다. ‘돈을 더 넣으면 이자로 10%를 주겠다’는 식이다. 피해자마다 이자 비율은 달랐지만 대략 5~10% 정도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카드 대금을 대신 결제해 주면 월 수수료로 0.8%를 주겠다는 말도 했다. 최씨의 말대로라면 카드로 100만원을 긁었을 때 수수료로 8000원이 발생한다. 당연히 카드 결제액이 커질수록 수수료도 많아진다. 피해자들은 자신의 카드를 내준 것도 모자라 몇몇은 카드를 새로 발급까지 받아 최씨에게 건넸다고 한다. 결말은 같았다. 카드 대금은 쌓여가고 수수료는 들어오지 않았다. 한 피해자는 “카드 대금이 계속 연체되고 한도 때문에 사용이 막히니까 리볼빙을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리볼빙은 카드 대금의 일부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미루는 서비스다. 당장 변제 부담은 덜하지만 잔액에 연이자가 15~19%가량 붙는다. 눈 깜짝할 새에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는 상품이다. 이자나 수수료는커녕 원금도 못 받는 상황이 계속되자 피해자들은 결국 최씨와 ‘중간 다리’ 역할을 한 사람들을 사기 혐의로 고소하기에 이른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보험설계사 등 피해자 7명은 지난해 12월 최씨를 포함한 5명에 대해 특정경제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사기) 등 혐의로 고소장을 접수했다. 7명 외에도 피해자가 3명 더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고소인 5명은 주범 최씨, 모집책 차모씨, 이모씨, 박모씨, 그 외 김모씨 등이다. 피해자 7명과 접점이 가장 적은 김씨를 제외하고 4명의 피고소인만 놓고 보면 역학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피해자들은 차씨와 이씨, 박씨 등이 최씨와 이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입을 모았다. 피해자 7명의 피해액은 26억8700만원에 달한다. 나머지 피해자 3명의 피해액까지 합치면 28억8000만원으로 불어난다. 이들은 계좌이체, 카드 결제 등의 방법으로 최씨 등에게 돈을 보냈다. 이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용까지 계산하면 피해액은 10억원 이상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 가운데서도 A씨의 피해액은 확인된 것만 약 17억원에 이른다. 피해자 7명의 전체 피해액(27억원) 중에 63%가 A씨의 몫인 셈이다. 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추가 이자 비용은 별도다. 이 돈까지 합치면 A씨의 피해액은 약 23억원까지 늘어난다. A씨는 차씨를 통해 최씨를 만났는데, 두 사람은 보험사에서 5년간 동료로 지냈다. 홀린 듯이 돈 보냈다 지난 7일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늦게까지 야근하고 있었다. 그는 “죽도록 벌어야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며 힘없이 웃었다. 2024년 초 ‘잠깐 바람이라도 쐬러 나오라’는 차씨의 부름에 나간 게 시작이었다. A씨는 인근의 카페에서 또 다른 피해자와 함께 최씨를 만났다. 또 다른 피해자는 차씨와 이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A씨는 “처음 만난 최씨는 쉽게 믿기 어려웠지만 차씨는 5년 동안 같이 일하면서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런 차씨가 나와 다른 피해자에게 ‘원금은 보장된다. 나도 2억을 벌었고 두 달 뒤에 추가로 1억을 번다’고 말하니 솔깃했다. 최씨의 신상에 대해서도 차씨가 신나서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심지어 차씨는 A씨에게 자신의 계좌를 보여주기도 했다. 카드 결제, 계좌 이체 등의 방식으로 최씨에게 돈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은 2024년 4월경부터다. A씨의 카드는 2024년 4월부터 8월, 지난해 2월에 집중적으로 사용됐다. 거래처는 정유사, 명품관 등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자동차 기름값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큰돈이 주유 대금으로 결제됐다는 점이다. 2024년 4월, A씨의 카드가 처음 사용된 날짜에 ‘○○석유’라는 곳에서 1200만원이 결제됐다. 이후에도 1000만원 단위의 돈이 ‘○○상사’ ‘○○○ 에너지’ 등에서 사용됐다. 카드로 긁어놓고 이후에 현금으로 되돌려받는 ‘카드깡’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동시에 최씨는 명품관에서도 총 7700만원을 긁었다. 이렇게 결제된 카드 대금은 3억6000만원에 달한다. 카드 대금과 수수료를 주겠다는 최씨의 말은 ‘공수표’였다. A씨는 “카드를 빌려준 쪽에서 돈을 넣어달라고 오히려 빌어야 했다. 몇 번을 요구해야 한번 돈을 넣어줄까, 말까였다. 한도가 막히면 다른 카드를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1년여에 걸쳐 최씨로부터 입금된 돈은 2억원. 원금과 주기로 한 수수료를 계산하면 턱없는 돈이다. 결국 A씨는 카드 대금으로만 1억5000만원을 뜯겼다. ‘짧게 쓰고 줄게’라며 빌려 간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피해자들은 최씨가 이자 명목의 돈을 주지 못한 시기를 2024년경으로 기억했다. A씨 역시 2024년 4월에 처음 돈을 넣고 한 달 뒤부터 제대로 돈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최씨가 회사 세무조사 등을 이유로 돈이 묶였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도 죽었나 ‘돈만 들어오면 A씨부터 챙겨줄게’라는 말은 당시 상황에서 A씨가 매달린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손절’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돈을 넣은 상태였고 어떻게든 원금만이라도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이 A씨를 지배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번만 빌려주면’ ‘곧 돈이 들어온다’는 최씨의 말에 속아 A씨가 빌려준 돈은 15억5000만원에 이른다. 문제는 이 돈이 전부 A씨 돈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A씨는 “동생, 부모님, 지인, 심지어 고객에게까지 돈을 빌렸다”고 털어놨다. 이 중 3억원가량은 집을 담보로 제3금융권에서 빌린 돈으로 즉, 사채다. 급하게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제시한 높은 이자율은 A씨의 목을 옥죄고 있다. A씨는 지금도 그 이자를 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의 악랄한 수법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최씨는 A씨가 보험설계사인 점을 이용해 그의 고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연결했다. 또 다른 피해자에게 보험금을 대납해 주는 방식으로 돈을 갚겠다며 A씨를 이용한 것이다. A씨는 해당 고객이 최씨와 연결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월 400만원이 넘는 보험을 2개 가입한 고객은 10개월 정도 보험료를 낸 뒤 사라졌다. 보험설계사는 고객을 유치하면 전체 납입 기간에 대한 선수수료로 익월에 월급을 받는다. 예를 들어 월 100만원, 20년 납기 보험을 든다고 하면 총 보험료 2억4000만원에 대한 수수료가 보험설계사의 몫이다. 능력에 따라 보험설계사의 연봉이 천차만별로 차이 나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단서 조항이 있다. 고객이 최소 25개월 이상 보험료를 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험설계사가 받은 월급은 ‘환수’ 조처된다. 보험설계사의 능력은 신규 고객 유치가 아니라 유지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20년 가까이 단 한 건의 환수 조처도 없던 A씨의 경력은 최씨로 인해 무너졌다. A씨의 동료이면서 피해자인 이들 역시 최씨, 차씨 등이 연결해준 고객이 보험금을 납입하지 않으면서 발생한 환수 조처로 허덕이고 있다. 지난해 11월 최씨에게 넘어간 1억5000만원은 결정타였다. 그전까지 약 10개월간 돈을 보내지 않고 빚 독촉만 했던 A씨는 최씨에게 “450억원이 들어왔다”는 말을 듣게 된다. A씨에 따르면 최씨는 수표 다발이 찍힌 사진을 카카오톡 메신저로 보냈다. 그러면서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는 과정에 1억5000만원의 수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다시 1억5000만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였다. 돈 못 빌려주면 카드라도 내놔 주범 최씨 다른 사건으로 재판 5000만원만 마련해 갔던 A씨는 그 자리에서 고객에게 1억원을 빌려 최씨에게 건넸다. A씨는 “무슨 영화를 찍는 줄 알았다. 사채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 ‘당신(A씨) 때문에 450억원을 출금 못하게 생겼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윽박질렀다. 최씨도 나서서 ‘빨리 어디에서라도 빌려봐’라고 계속 압박했다. 정말 내 책임이 될 것 같은 마음에…”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후 1억5000만원은 공중으로 사라졌다.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뼈까지 발라 먹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A씨는 최씨에게 말 그대로 ‘탈탈’ 털린 상태였다. A씨의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까지 속을 수 있냐고 의문을 표했다. 결국 A씨도 피해자들도 쉽게 돈을 벌고자 했던 욕심에 눈이 먼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실제 피고소인 가운데 1명인 김씨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나 역시 최씨에게 빌려준 돈이 상당하다. 그걸로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되짚어 보면 내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고소인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돈 욕심에 시작했다가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하니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황유준 법무법인 LKB평산 변호사는 “피해자들은 실제 존재하는 웅덩이에 발을 담근 게 아니다. 웅덩이 자체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다. 다시 말해 투자의 배경이 되는 회사나 사업체 같은 실체가 아예 없었다. 즉, 최씨는 처음부터 피해자들을 기망할 의도로 만났고 피해자들을 끌어들인 피고소인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씨는 A씨 등에게 받은 돈을 투자 목적이 아닌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기 위해 피고소인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최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몇몇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물을 뿐이었다. 유일하게 통화가 연결된 김씨는 “최씨는 고소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부자도 아니고 특출난 사람도 아니다. 걔도 사업 과정에서 돈 문제가 꼬여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걔도 사기 피해자”라며 “가족하고도 사이가 틀어졌고 정말 죽지 못해 사는 것으로 안다. 나는 (최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고 울먹였다. 최씨 사건은 크게 확산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미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이 있고 A씨 등의 고소 사건도 비슷한 유형이라 검찰 송치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또 다른 보험사 지점, 헬스케어 제품 회사, 화장품 회사 등에도 피해자가 있다. 이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면 최씨를 비롯한 중간 모집책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상당히 좁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피해 금액이 크기에 이들은 형량이 높은 ‘특경법’에 걸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이 사건으로 2명이 자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도 나도는 상태다. 최씨와 피해자 사이에서 모집책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과 큰돈을 투자했던 한 남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이다. 피고소인들은 이 여성이 원래 우울증을 앓았고, 남성은 지병이 있었다고 반박했다. 추가 피해자 더 나올 듯 과거 사기 사건을 맡았던 한 변호사는 “피라미드, 다단계 사기 사건의 진짜 공포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돈을 뜯겼던 피해자가 원금을 회복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는 구조다. 사기 사건이 정말 사람을 죽이는 살인 사건에 비견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피해자들은 이미 죽은 상태나 다름없다. 영혼이 다 빠져나갔을 것”이라며 “일전에 사기 사건 피해자들을 변호하면서 ‘소리 없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자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고 생각한 적 있다.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