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정사에서 가장 부끄럽고 황당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될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3일,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서 서울 강남구, 광진구, 송파구 투표소를 찾은 일부 유권자들이 “투표용지가 모자라니 기다려달라”는 기가 막힌 안내를 받은 것이다.
특히 잠실7 제2투표소에서는 투표 시간이 4시간 연장된 오후 10시까지 실시되며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은 예상치 못한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민주주의의 축제이자 국가의 가장 신성한 제도적 장치인 선거에서, 다른 것도 아닌 투표용지가 바닥나 투표가 중단됐다. 국민의 참정권을 다루는 국가 기관이 ‘모든 유권자가 투표하러 올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외면한 채 ‘비용 절감’을 위한 행정 편의주의로 특정 지역의 투표율 예측에 실패하는 대형 참사를 내고 말았다.
이번 사태를 마주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입장과 태도는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게 만든다. 선관위는 “특정 투표구의 유권자 수가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해명했다.
이날 오후 해당 사태가 언론에 보도되자 급히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진화에 나섰다.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사과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허 사무총장은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되어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튿날인 4일 오전에는 위원 회의 후 입장문을 통해 “잔여 물량을 긴급 수송했고 대기한 유권자에게 번호표를 배부해 투표권을 보장했으니 법적으로 선거 무효나 재선거 사유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는 표면적인 법리 해석 뒤로 숨어 자신들의 치명적인 행정 실패를 덮으려는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변명이다.
하지만 당장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투표용지를 확보하지 못한 과오까지 덮어질 수는 없다.
선관위 및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날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이유는 해당 지역의 전체 유권자 수만큼 용지를 인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방선거는 총선이나 대선과는 달리 투표율이 낮게 나와 예산 절감 차원에서 본투표용지를 유권자의 50~70% 수준으로만 인쇄하는 오랜 관행이 이어져 왔다고 한다.
선관위가 간과한 것은 또 있다. 민주 선거의 가치는 단순히 ‘마지막 한 명까지 투표를 마쳤는가’라는 기계적 결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권자가 아무런 방해와 불편 없이 온전히 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과정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있다는 점이다.
투표용지 부족은 단순한 ‘예측 실패’나 ‘행정 착오’로 치부할 수 없는 심각한 직무유기다. 선관위는 관할 구·시·군별 유권자 수를 소수점 자리까지 파악하고 있는 집단이다. 사전투표율과 당일 투표율 추이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시스템과 수십년간 쌓아온 선거 데이터도 갖고 있다.
특정 투표소에 유권자가 몰릴 가능성을 대비해 충분한 여유분을 인쇄하고 배치하는 것은 선거 행정의 가장 기초적인 매뉴얼이다. 이 당연한 기본조차 지키지 못해 투표소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선관위가 본연의 임무를 얼마나 안일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선관위의 “기다려서 투표했으니 문제없다”는 식의 해명은 유권자의 권리를 모독하는 처사다. 현장에서 한 시간, 두 시간씩 발이 묶였던 유권자들의 기회비용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생업을 잠시 미뤄두고 짬을 내어 찾아온 자영업자, 혹은 몸이 불편한 교통약자나 고령의 유권자 중 일부는 대기를 견디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번호표를 받고 끝내 투표를 마친 이들조차 국가 기관의 무능 때문에 불필요한 고통과 피로를 감내해야 했다. 이는 명백한 주권 행사의 방해며, 유권자의 소중한 한 표를 가볍게 여긴 행정 편의주의의 극치다.
외국의 선례를 보면 우리의 대처가 얼마나 안이한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거 독일 베를린 선거 당시, 투표용지 부족과 행정 혼란으로 투표가 지연되고 일부 유권자가 투표를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독일 헌법재판소는 선거 전체를 무효로 선언하고 전면 재선거를 명령했다.
선거의 평등성과 보편성이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행정의 무능으로 훼손됐다면, 그 결과 역시 정당성을 잃는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반면 우리 선관위는 개표는 중단될 수 없으며 선거 결과에는 영향이 없다는 법적 방어막을 치기에만 급급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태가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과 음모론’의 불씨를 지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선거철마다 부정선거 의혹과 불신으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상황에서, 선관위가 스스로 빌미를 제공한 꼴이 됐다. 용지가 부족해 인근 투표소나 선관위에서 급하게 수송해 온 투표용지가 철저한 보안 속에서 관리됐는지, 그 과정에서 부정의 소지는 없었는지 유권자들이 의구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국가 선거 관리의 생명은 ‘티끌만 한 의혹도 남기지 않는 철저함’에 있다. 선관위는 스스로 선거의 신뢰성을 깎아먹고 사회적 혼란을 자초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관으로서 막강한 권한과 예산을 보장받는다. 그 이유는 정권의 외풍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민주주의의 원활한 작동만을 위해 복무하라는 국민의 명령 때문이다. 하지만 작금의 투표 용지 부족이라는 사태는 권한만 누릴 뿐 그에 걸맞은 책임감과 전문성은 상실한 것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소동’으로 치부돼서는 안 된다. 선관위 지휘부를 포함한 책임자들에 대한 엄중한 문책이 있어야 하며, 투표용지 인쇄·배부·통제 시스템 전반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선관위가 이번 행정 참사를 뼈아프게 반성하고 쇄신하지 않는다면, 향후 치러질 그 어떤 선거 결과도 국민을 온전히 승복시키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완벽한 행정 위에서만 단단하게 뿌리내릴 수 있음을 선관위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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