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는 남대문이나 동대문이 아니라 ‘나라 보지’를 말하는 거야. 국가에서 우리 몸뚱이를 이용했으니…그 무서운 곳을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 부른 건 낭만이 아니라 야유하기 위해서였지…우리 보지는 나라의 보지였어!” <어느 위안부 할머니의 절규>
백발 노파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어떤 인연으로 자식을 삼으셨어요? 친자식을 버리는 엄마도 있는데….”
“이런 기지촌에서 태어난 애들은 굴뚝새 새끼들과 같은 신세야. 엄마가 살펴주지 않으면 사악한 기생충에게 먹히고 말지. 어린 애들은 병에 걸려 죽기도 하지만, 사람 손에 팔려가 암흑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거야.”
기생충 먹이
“그럼 그 애들도요?”
“걔들은 그나마 엄마가 죽을 때까지 보듬고 있었어. 시체가 된 에미의 젖을 빨다가 울다가 하고 있더군. 하나는 백인 새끼고 하는 흑인 새끼였어. 세월이 흘러 두 놈 중에 하나가 살인범이란 소문이 났었지만 다 미국으로 도망치고 말았지 뭘.”
“참 비극적이군. 만일 셰익스피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드라마틱한 극본을 썼을지 궁금해.”
피에로가 끼어들었다.
“미친 소리 작작하구 술이나 마셔.”
“누님, 너무 슬퍼 마슈. 내가 더 구구절절 가슴을 울리는 시나리오를 써서 만고에 남을 영화를 만들 테니까.”
“말이사 늘 좋지.”
백발 노파는 주름살을 잔뜩 찡그리며 빙긋 웃었다.
“그런데 누님 내가 극본을 쓰려 해도, 주인공이 될 누님의 나이가 몇인지 잘 몰사서 캐릭터가 좀 헷갈려.”
“쳇, 무식한 녀석이 영어 나부랭이나 쓰면 좀 유식해질 것 같냐? 에라 이 어릿광대 녀석 같으니라구 흐흣, 너희들은 날 이상스런 할멈으로 보는 모양인데, 난 사실 평범한 여자일 뿐이란다. 아, 가난한 고향 산천에서나마…그 오빠도 일본으로 끌려가지 않고 나도 만주로 끌려가지 않고 고향 땅에서 부부로 만나 오붓이 함께 살 수 있었다면, 그래서 난 항상 열일곱 나이에 멈춰 사는지도 몰라.”
그녀의 충혈된 눈에 눈물방울이 맺혔다. 억누르려 애썼으나 저절로 생겨난 그 눈물을 보며 청운은 소주보다 더 맑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잔을 들어 마셨다. 소주잔에 비친 여인의 모습이 아련해 보였다.
“눈이 여전히 내리는군.”
백발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모습은 백발의 겉모습보다 늙어 보이지 않았다. 세파에 찌들어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문득 그 눈엔 순수한 마음이 반짝 어린 듯도 했다.
멀리서 은은히 종소리가 들려왔다. 피에로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앗! 벌써….”
“응?”
“고단했던 하루도, 한 해도 지나고 이미 새해가 시작됐네요.”
“그게 뭐 그리 중요한고, 후훗.”
백발 노파가 중얼거렸다.
좀더 중요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1960년대가 지나고 1970년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운은 십대의 마지막을 어렵게 지나 이윽고 스무 살이 되었다.
새해 들어 청운은 의외로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 피에로 형이 잘 아는 어느 미군 장교의 안내로 미군부대 내부를 구경하게 된 것이었다.
회색 담장 위에 철조망이 높게 쳐진 삭막한 풍경 저 안쪽엔 과연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부대 안으로 들어선 청운은 내심 깜짝 놀랐다. 머릿속으로 공상하던 일반 군부대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군 부대에 대한 인상이 삼엄하고 황량한 일종의 수용소 같다면, 미군 부대는 마치 거대한 놀이공원이나 산뜻한 신식 공장 또는 대학 캠퍼스처럼 보였다.
거대한 놀이공원? 대학 캠퍼스?
미군 부대 내부는 하나의 소왕국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하나의 소왕국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지프차는 잘 포장된 길을 달려 나갔다. 진입로에 사열병처럼 늘어선 나무들은 잎이 다 진 채 하얀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본부 건물은 저 멀리 위엄스레 우뚝 선 채 푸른 하늘에 성조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길 양옆의 널따란 평지엔 정원처럼 잔디가 깔렸고 푸른 빛을 잃지 않은 조경수들이 잘 다듬어져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연병장도 마치 온갖 헬스 기구가 잘 갖춰진 운동장인 듯싶었다.
장교클럽 입구의 화려한 장식물들, 아담한 도서관과 최신식 장비를 자랑한다는 병원, 넓은 수영장에 출렁거리는 맑은 물, 탁 트인 전망이 부러워 보이는 곳에 들어선 아파트…
20여분 동안 지프차를 탄 채 돌아다녔으나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일종의 디즈니랜드 같았다. 골프장까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중단했다.
겨울이지만 포근한 휴일이라 그런지 맨션아파트 앞의 광장에서는 가든파티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로 하얀 접시와 유리잔들이 햇빛을 투명하게 반사하고, 바베큐가 황금색으로 익어 가며 향긋한 냄새를 풍겼다. 산해진미와 미주 美酒를 앞에 둔 미군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행복스러웠다.
‘미국은 원체 땅이 넓으니까 여기서도 자기네들 몸에 맞게 아주 스케일 크게 지어 놨구나. 미국의 작은 도시 하나를 옮겨 놓은 것 같아. 흐, 이 정도면 아예 리틀 텍사스라고 불러도 되겠어. 저들에겐 이것도 좀 좁은지 몰라. 아, 하지만 얼마나 많은 농부들의 터전인 기름진 논밭이 저 밑에 깔려 버렸을까. 반강제적이라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던데.’
청운은 홀로 생각에 잠겨 미군 장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용산의 미군 기지는 여기에 비하면 마치 왕궁과 같다고나 할까.”
피에로가 말을 꺼냈다.
“뭐?”
청운이 대꾸했다.
“히히, 뭘 그리 놀라? 언젠가 미8군 소속 악극단을 따라 한번 들어가 봤지 뭐.”
“정말?”
“응. 하지만 정규 단원이 아니라 시다바리 역할이었어, 쯧.”
“그래, 어땠어?”
리틀 아메리카
“한마디로 엄청나더군. 서울 한가운데의 노른자 땅 100만 평이 다 미군부대니까. 기지 안으로 들어가는 문만 스무 개가 넘는다더군. 메인 포스트엔 주한미군 사령부, 미8군 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따위가 있는데, 그 지하에는 극비 지휘소를 비롯해 상상도 못할 시설이 들어서 있대. 그리고 남쪽 지역엔 고급 맨션 단지와 학교, 병원, 스포츠센터 등등 거대한 편의 시설이 삐까번쩍하더군. 북쪽 지구엔 한층 더 산뜻하고 첨단적인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한국 사람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다더구먼. 아무튼 말이야 봄에 꽃이 화려하게 핀 그곳의 드넓은 정원은 정말 꽃대궐 같았어. 아, 언제 그 화려찬란한 무대에 서 볼까나.”
피에로는 사근사근하고 희극적인 표정으로 미군 장교와 이따금 얘기를 나누면서 청운에게 그런 말을 속닥거렸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