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자란 ‘명픽’ 출마자들

대통령 이름 대고 무임승차?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전국 단위 선거에서는 후보의 인지도도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후보들의 체급은 대통령이 언급하기 전과 후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의 친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못하는 법.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픽’ 후보들의 수난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하정우 부산 북갑 후보가 혹독한 정치 신고식을 치렀다. ‘손털기’부터 ‘오빠’ 논란까지, 정치 초보를 겨냥한 유권자들의 회초리가 매섭다. 이재명 대통령이 뽑은 인재라는 점에서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다는 해석이 나온다.

당정이
키웠지만…

하정우 후보는 대통령실 신설 직책인 인공지능(AI) 미래기획수석 출신으로 지난해 6월 이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인물이다. 그는 향후 5년간 100조원 규모로 예고된 국가 AI 투자 및 인프라 전략을 총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 등 이재명정부의 AI 산업을 이끌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유독 하 후보를 아끼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국무회의서 훈훈한 ‘케미’를 보여주는가 하면 대통령이 묻는 말에 막힘없이 답해 “우리 하GPT(하정우와 챗GPT를 합친 단어)는 다 알고 있네”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 후보의 차출설이 돌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민주당 전재수 의원의 부산시장 출마로 열리는 부산 북갑에 그를 전략공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다.

하 후보의 출마를 두고 청와대와 민주당 사이에는 불편한 기류가 맴돌았다. 지난 4월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AI 수석이던 하 후보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이에 이 대통령은 국가경제자문회의에서 “우리 하GPT가 할 일이 많은데 작업 들어오는 것 같다. 작업 들어온다고 넘어가고 그러면 안 돼요”라고 직접적으로 말했다.

청와대는 차출설에 선을 그었지만 당 지도부는 연일 하 후보의 이름을 거론하며 출마를 설득했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 “출마 여부는 하 수석이 결정하기에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하 수석의 마음이 정해져야지, ‘나가라’ 해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나가지 말라’ 해서 나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본인이 결정해야지, 대통령이나 당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 대표가 “우리 당으로선 쉽지 않은 지역인 북갑에 하 수석 말고는 이길 후보가 없다”며 거듭 강조하자 결국 하 후보는 “고향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다”며 출마 결심을 굳혔다. 일련의 사건이 하 후보의 체급을 키우기 위한 당정 간의 약속 대련이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이유다.

청와대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지만 첫 선거 유세서부터 발목이 잡혔다. 유세 첫 일정으로 방문한 구포시장에서 상인과 악수를 한 뒤 양손을 비비거나 손을 터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면서 이른바 ‘손털기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국민의힘으로부터 “오만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하 후보는 “처음으로 수백, 수천명과 처음으로 악수를 하다 보니 손이 저려 무의식중에 손을 쳤던 것 같다”며 당사자를 찾아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하정우·정원오’ 호명하자
단숨에 관심·인지도 ‘쑥’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3일에는 ‘오빠’ 사건이 발생했다. 부산을 찾은 정 대표는 구포시장에서 하 후보 지원 유세를 하던 중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여기 ‘정우 오빠’ 오빠 해봐요”라고 말했다. 정 대표는 거듭 “오빠(해봐요)”라고 말했고 하 후보도 “오빠”라고 반응했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해당 장면이 담긴 영상을 SNS에 올리며 “62세 정청래 대표와 50세 하정우 후보가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에게 ‘오빠라고 불러보라’고 강요하는 모습은 참 낯뜨겁다. 망설이는 아이에게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재차 ‘오빠라고 해보라’고 재촉하는 모습은 일종의 아동학대나 다름없다”고 비난했다.

여성단체에서도 “성인지 관점의 부재”라며 두 사람의 행동을 규탄했다.

하 후보는 캠프를 통해 “오늘 지역 주민을 만나는 과정에서 아이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며 “이로 인해 상처받으셨을 아이와 부모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정 대표도 민주당 공보국을 통해 “구포시장 방문 과정의 상황과 관련해 아이가 논란의 중심에 서게 돼 상처받으셨을 아이와 아이의 부모님께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정원오 서울시장도 대표적인 ‘명픽’ 인물이다. 선거 초반 불거진 ‘칸쿤 여행지’ 의혹으로부터 겨우 벗어나나 싶더니 하 후보와 마찬가지로 구설에 오르내리며 곤욕을 치르는 모양새다.

정 후보는 지난해 12월 이 대통령이 자신의 SNS에 한 여론조사를 공유하며 “정원오 성동구청장님이 잘하기는 잘하나 보다. 저의 성남 시정 만족도가 꽤 높았는데 명함도 못 내밀 듯”이라고 쓴 것이 온라인에 퍼지면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정 구청장은 “‘원조 일잘러’로부터 이런 칭찬을 받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더욱 정진하겠다”고 답했다. 이후 정원호 후보는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이재명정부와 손발이 맞는 서울시장”을 강조하며 다른 주자들과의 차별화에 나섰다.

그런 정 후보도 실언에 발목을 잡혔다. 지난달 CBS 라디오에 출연해 “시장직을 수행하는 사람이 대권을 바라보면 그때부터 불행해진다”며 “제가 경험해 본 박원순 전 시장, 그리고 오세훈 시장이 똑같다. 이상한 일들이 막 생기고 이상한 고집을 피우고 그런 것이 바로 대권을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발언한 것이 화근이었다.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이름을 올린 만큼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대권보다는 시정에 집중하겠다는 취지였지만, 고 박원순 전 시장을 오세훈 시장과 동일시했다는 이유로 당내에서 논란이 됐다.

오만했나?
실수 또 실수

당시 서울시장 예비후보로 경선을 치렀던 전현희 의원은 “고 박원순 전 시장님을 오세훈 시장과 ‘똑같다’고 평가한 정원오 후보의 발언은 고인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한 것으로 철회돼야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며 박주민 의원은 “박원순 전 시장이 공도 있고, 과도 있겠습니다마는 오세훈 시장처럼 ‘대선에 눈이 팔려서 시정을 망쳤다’는 평가를 저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잘못된 말씀”이라고 지적했다.

정 후보는 자신의 발언으로 논란이 불거지자 SNS를 통해 “마음의 상처를 입으신 분들께 정중하게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이어 “저는 박원순 전 시장님 곁에서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고, 시장님의 고뇌를 지켜보면서 너무도 안타깝게 생각했던 사람”이라며 “제가 말씀드리고자 했던 취지는, 서울시장은 오직 시민의 삶과 서울의 미래에 집중해야 하는 자리이며, 저 또한 그 책임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몇 주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컨설팅’ 논란에 휩싸였다. 남대문시장에서 ‘장사가 너무 안 된다’는 상인에게 “장사가 왜 안 돼요, 관광객이 이렇게 많은데”라며 “계속 이러지 마시고 컨설팅을 한번 꼭 받아보세요”라고 말한 것이 뒤늦게 회자한 것이다.

오세훈 후보가 “시민을 가르치느냐”며 공세를 퍼붓자 정 후보 캠프 측은 “오세훈 후보 측의 굴절된 마음이 굴절된 시각으로 민심 청취 상황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관련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국민의힘이 워낙 여건이 좋지 않다 보니 작은 일도 꼬투리를 잡아 크게 벌리는 것을 생존 수단으로 정한 것 같다”면서도 “네거티브 공격이 들어올 만한 빌미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선거철에 민심이 추락하는 것은 한순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자칭 타칭 ‘이재명픽’이라고 강조하는 이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중에서도 ‘이재명의 선택’을 캠프 슬로건으로 내건 김용남 평택을 후보는 같은 곳에 출마한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 조국 대표와 설전을 벌이며 강도 높은 네거티브 공세를 주고받고 있다.

조 대표는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을 거쳐 민주당에 입당한 김용남 후보를 저격하며 “이정부의 국정 철학과 맞지 않다고 본다” “과거 김 후보가 대장동 사건을 거론하며 이 대통령의 무기징역을 주장했었다” 등 견제구를 던졌다.

살아남은
최후 1인

김 후보가 과거 보수 정당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조국 사태뿐 아니라 검찰개혁, 이태원 참사 등에 대해 내놨던 과거 발언을 재점화하기도 했다.

김 후보는 “과거 보수 정당에서 원내대변인 직책을 맡다 보니까 정파적 입장을 대변하는 상황에서 민주당 지지층이나 민주·진보 진영 분들에게 거북한 말씀을 드렸던 적이 많이 있었을 것 같다”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죄송스럽다”고 먼저 양해를 구했다.

그러면서도 조 대표의 사모펀드 등을 겨냥한 듯 “적어도 조 후보님과 관련해서 사실과 다른 말씀을 드렸던 기억은 전혀 없다. 지금 아무리 곰곰이 되돌려 봐도 사실관계는 틀림없어 보인다”고 말했고 이를 시작으로 친문(친 문재인)과 친명(친 이재명) 간의 갈등이 또다시 불거질 조짐이 보였다.

잡음이 커지자 민주당은 입단속에 나섰다. 지방선거를 한 달 앞둔 지난달 29일 정 대표는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오만한 언행에는 지위를 막론하고 단호하게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이같이 밝히며 “당 대표인 저부터 불광불급·종횡무진·전광석화·지성감천의 낮고 겸손한 자세로 국민 속으로, 현장 속으로 달려가겠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이 힘을 못 쓰는 상황에서도 민주당이 책을 잡히자 일부 후보들이 ‘이재명 후광’을 믿고 안일하게 선거에 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대통령이 직접 띄워주고 밀어준 만큼 여권 프리미엄을 기대하고 있지만, 여론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지금부터는 개인 역량으로 승부를 봐야한다는 뜻이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후계자를 키우지 않는다. 철저하게 개인주의 성향”이라며 “이 대통령은 특정 인물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한 게 전부다. 그걸 가지고 ‘대통령이 뽑은 나’에 취해 선거를 그르치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어 “후보를 호명하고 몸값을 띄워주는 것까지가 이 대통령의 역할”이라며 “이후 어떻게 살아남는지는 철저하게 본인의 역량이고, 이 대통령은 여기서 끝까지 남는 이들만 자신의 그룹에 넣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친명’ ‘찐명(진짜 친명)’만 강조한 이들은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 다 탈락했다”고 부연했다.

역량 부족? “자기 일은 스스로”
‘친명’ 훈장만 믿었다간 낭패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은 ‘이재명의 남자’로 알려졌지만 이번 지방선거 공천에서 배제됐다. 김 전 부원장은 “안산·하남 어디든 국민께 심판받겠다”며 지도부에 신호를 보냈지만 민주당 지도부는 그의 출마가 보수 결집의 명분이 되는 등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이 같은 선택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 조승래 사무총장은 경기 지역 전략공천 결과 발표 후 김 전 부원장의 공천 배제에 대해 “이번 선거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먼저 정리한 것”이라며 “특정 후보의 리스크가 표심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현장 후보들의 우려를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당내 친명계 의원들은 김 전 부원장을 ‘검찰 수사의 피해자’로 규정했고, 공천을 통한 정치적 명예 회복을 요구했으나 당 지도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재명 2기 지도부에서 최고위원을 지낸 친명 한준호 의원도 경기도지사 예선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 대통령의 ‘1호 감사패’를 받은 만큼 경기도지사 출마 당시에도 이 대통령의 의중을 등에 업고 나섰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2차 예선서 추미애 후보에게 밀려 패배했고, 정치권에서는 “큰 단위의 선거에서는 특정 인물과의 관계보다는 개인 역량이 중요한데 그 점을 간과한 것 같다”는 해석이 나왔다.

국민의힘 성일종 의원은 “지금 대통령이 취임한 지 1년이 안 됐다. 그런데 ‘한준호픽(한 후보와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며 “반면 지금 추미애 후보 같은 경우는 강성 지지층의 지원이 있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인구도 가장 많고 당원도 가장 많은 경기도에서 추미애 후보가 한번에 후보를 확정했다”며 “이변이 일어났다. 권력 흐름이 바뀌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설명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현역을 모두 물갈이하는 과감한 쇄신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출신이거나 이 대통령과 가깝게 일한 이들도 대거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인천시장 후보로 단수 공천된 박찬대 의원은 이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시절 원내대표로 호흡을 맞췄던 핵심 인사다. 이정부 첫 정무수석인 우상호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강원도지사 후보로 1호 단수공천을 받았다.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이 직접 ‘입당하면 좋겠다’고 언급한 김상욱 의원은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힘에서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그는 탈당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민주당 울산시장 후보가 됐다.

원팀이거나
업보거나

코스피 상승과 맞물려 이재명정부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지고 있지만 ‘대통령의 후광효과’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조언이 나온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대통령과의 친분을 앞세워 여권 프리미엄을 강조하는 것은 흔한 현상이지만 오로지 후광효과만 보려고 하는 현상도 늘어났다”며 “다만 우려가 되는 건 만약 이들이 모두 당선됐을 때, 시간이 지나고 다음 선거가 ‘심판론’으로 치러진다면 부정적 평가는 이정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밝혔다.

<hypak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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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투표용지가 없다니…’ 초유의 사태 후폭풍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선거가 끝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후폭풍이 따라온다. 이긴 쪽은 동력을 얻고 진 쪽은 수습에 나선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는 결과만큼이나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보가 회자할 것으로 보인다. ‘투표용지 부족’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불러온 후폭풍이 지방선거를 뒤흔드는 모양새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이재명정부 출범 1년(4일)을 앞두고 치러졌다. 선거 자체가 국민의 심판을 받는다는 취지로 치러지는 만큼 여야는 결과에 사활을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등에서 싹쓸이로 의회 권력에 이어 지방 권력까지 차지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국민의힘은 ‘견제’를 외치며 맞섰다. 누구 손도 안 들어줘 민심은 절묘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은 총 16개 시‧도 중 12곳에서 이겼다. 결과만 놓고 보면 압승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격전지였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채 1% 차이도 나지 않게 석패했다. 관심을 모았던 대구에서도 졌다.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도 관심이 집중된 부산 북구갑에서 의석을 내줬다. 반면 국민의힘은 선거 초반 전패를 예상했던 것과 비교해 상당히 선전했다는 평을 받는다. 서울을 수성했고 텃밭인 대구에서도 예상보다 수월하게 이겼다. 경기 평택을 선거에서도 ‘어부지리’지만 의석 하나를 건졌다. 민주당으로선 이겨도 찜찜한, 국민의힘은 졌지만 미묘하게 웃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온 셈이다. 이제 여야는 물론 이재명 정부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을 마주해야 한다. 여야 모두 ‘완벽하게 이겼다, 혹은 졌다’는 결과를 받아든 게 아니기에 후폭풍은 작지 않으리라고 예상된다. 전당대회를 앞둔 민주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두고 당권 싸움을 시작할 것이고, 보수 궤멸 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은 국민의힘에서도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여기에 또 다른 후폭풍이 더해졌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 후폭풍의 크기는 선거 결과에 따른 후폭풍과는 차원이 다르다. 선거의 신뢰성 문제까지 뒤흔들 수 있는 수준의 초대형 태풍급이다. 선거에서 심판 역할을 맡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도마 위에 올랐기 때문. 지난 3일 지방선거 본투표 중에 서울 일부 지역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가 투표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유권자의 참정권 행사라는 선거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에 취지가 훼손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같은 일이 투표소 한 군데가 아니라 십수 군데서 발생했다는 점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를 비롯한 12개 투표소와 강남구 1개 투표소, 광진구 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대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관위는 사태를 인지한 후 투표용지를 이송하고 현장 대기 인원에 한해 투표를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쿠리 이어 투표지가 없다? 부정선거 논란에 불 질렀다 하지만 잠실7동 제2투표소는 대기표를 받은 유권자를 대상으로 오후 10시까지 투표 시간을 연장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동시에 소식을 접한 시민과 유튜버 등이 투표소에 몰리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함 반출을 둘러싸고 선관위 관계자와 시민 사이에 대치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선거의 공정성과 신뢰성에 강한 타격을 입혔다. 특히 서울시장 선거는 국민적 관심이 집중됐던 데다 개표가 진행되면서 출구조사보다 실제 결과가 훨씬 박빙으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개표가 진행되는 와중에 투표도 동시에 이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여야는 물론 지지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국민의힘은 개표 중단을 요구했다.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발생한 지역이 공교롭게도 서울 지역 내에서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강남권’으로 확인되자 당력을 집중한 것이다. 국민의힘 장동혁 상임선대위원장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개표를 중단하고 결과에 따라 서울시 선거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표를 멈추고 상황에 따라 재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민주당은 선관위에 책임을 묻겠다면서도 국민의힘의 개표 중단, 재선거 요구는 일축했다. 민주당 조승래 총괄선대본부장은 국민의힘의 요구에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선관위의 부실한 선거 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선거를 다시 치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으로 풀이됐다. 선관위 역시 대국민 사과를 하면서도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앞서 허철훈 선관위 사무총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혼란과 심려를 끼쳐 드렸다”며 “소중한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투표소를 찾아주신 국민께 불편을 드리고 공정한 선거 관리에 대한 신뢰를 훼손한 점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빙에서 불 질렀다 그러면서 “중앙선관위는 이번 사안을 엄중히 인식하고 있으며 개표가 종료되는 즉시 일부 투표소의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원인과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며 “미흡한 준비와 대처로 실망을 드리게 돼 다시 한번 사과드린다”고 덧붙였다. 또 이상능 선관위 선거1국장은 “이런 사례가 과거 선거에서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송파구의 경우 전체 유권자 수의 50% (규모의 투표용지)를 인쇄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몇 표 차이로 선거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윤재수 선거관리정책실장은 “저희가 직접 말씀드리기는 좀 곤란할 것 같다”며 “소송 절차 등을 통해 법원의 결정에 따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했다. 선관위는 지난 4일 0시께 긴급 위원회를 열고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이후 위원회는 “(투표용지 부족 문제가) 공직선거법에 따른 선거 연기나 재선거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내놨다. 또 “현재 진행되는 개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강조했다. 국민의힘의 요구에 선을 그은 것이다. 이번 사태로 선관위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다. 이번 일뿐만 아니라 선거 때마다 일어났던 ‘선관위발’ 논란이 ‘파묘’되는 분위기다. 가장 큰 논란 중 하나는 ‘소쿠리 투표’다. 2022년 대선 당시 코로나19 확진자와 격리자의 사전투표 용지를 간이 용기나 쇼핑백 등에 담으면서 촉발된 논란이다. 지난 조기 대선 때도 서울 신촌의 한 사전투표소에서 관외 선거를 위해 대기하던 일부 유권자가 대기 줄이 길다는 이유로 투표용지를 받은 채 식사하고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선관위의 행태는 일부 극우층에서 제기하는 ‘부정선거’ 논란에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은 본투표에 앞서 이틀간 진행되는 사전투표가 조작됐다는 등 부정선거가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는데, 선관위 관련 논란도 그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재선거까지 나왔지만… 부정선거 논란을 차단해야 할 기관에서 오히려 의심만 제공하는 꼴이다. 일각에서는 선관위 내부 사정이 반복되는 부실 선거의 배경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한 언론이 민주당 채현일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일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176명으로 집계됐다. 최근 10년 새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 육아휴직이 1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질병 휴직 30명, 가족 돌봄 휴직 11명, 해외 동반 휴직 8명 등이 뒤를 이었다. 지방선거, 대통령선거, 국회의원 선거 등 이른바 3대 전국 선거 때마다 휴직자가 늘어나는 선관위의 고질적인 병폐가 또다시 되풀이됐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 2022년 5월 기준 선관위 휴직자 수는 218명으로 최근 10년 기준으로 가장 많았다. 당시 3월에는 대선, 6월에는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으로 갑작스럽게 치러진 지난해에도 선거를 한 달 앞둔 5월 기준 휴직자는 145명에 달했다. 이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지적되자 선관위도 선거 기간에는 휴직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공지를 내리는 등 개선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육아휴직 등은 강제로 제한할 수 없으니 인력을 채용하는 방향으로 인력 공백을 막겠다는 대응책도 내놨다. 하지만 앞서 선관위 내부에서 채용 관련 비리 의혹이 크게 불거지면서 이마저도 미덥지 못한 방안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선거 때마다 논란이 불거지고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 등으로 지적을 받는 와중에도 선관위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라는 방패를 내세워 ‘지금만 넘기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이 선관위를 좀먹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자정을 할 수 없으면 외력이라도 가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막혀 있다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구설 불거지는데… 자정은커녕 외부 감사도 안 돼 2023년 5월 당시 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가 선관위 경력직 채용에 특혜를 받았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아빠 찬스’ 논란의 시발점이다. 이후 선관위 자체 특별감사 결과 고위직 자녀 특혜 채용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감사원이 선관위의 인력 관리 실태에 관한 직무감찰에 착수했다. 그러자 선관위는 ‘독립기관’임을 내세우면서 감사원 감사를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회는 물론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선관위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감사원의 감사 범위를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2023년 7월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헌재는 선관위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해 2월 헌재는 “이 사건 직무감찰은 헌법 및 법률상 권한 없이 이뤄진 것으로 선관위의 독립적 업무 수행 권한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감사원의 감사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헌법에 기재된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행정부 내부의 통제장치로서의 성격”인 만큼 정부와 독립된 헌법기관인 선관위는 국회, 법원, 헌재와 같이 직무감찰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 배경으로 선관위의 선거 관리 업무를 들었다. 대통령 소속 기관인 감사원이 독립된 헌법 기구인 선관위를 직무감찰할 수 있게 되면 선거 관리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훼손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감사원의 직무감찰 배제가 곧바로 부패 행위에 대한 성역의 인정으로 호도돼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헌재는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이를 대신할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자체 감찰기구가 마련될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며 “선관위는 자체 감찰제도의 실효성을 담보함으로써 우려를 불식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내부 자정 기능에 기대를 건 것이다. 이번에는 고쳐질까 하지만 채용 의혹은 차치하고라도 그 이후에도 가장 본연의 업무인 선거 관리에서 계속해서 잡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서 선관위를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한 점에 대해 매우 큰 유감을 표한다”며 “국민의 참정권이 한치라도 훼손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신뢰할 만한 적절한 대책을 조속하게 마련해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제 지방선거는 끝났다. 선관위는 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