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현실판 하니’ 왕서윤

국내 여자 중 가장 빠른 중2 소녀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고작 중학생이다. 한창 자랄 나이인 14세. 왕서윤이 대학부와 실업팀 언니들을 모두 따돌리고 올해 국내 여자 100m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스포츠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같은 나이라 현실판 ‘달려라 하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일 전라남도 목포종합운동장 육상경기장. 여자 중학생 여덟명이 날렵하고 가벼운 몸에서 긴장을 덜어내려 온몸을 두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다.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 3일 차, 여자 중등부 100m 결선이 치러지기 직전이다.

타고난
유연성

ENG 카메라 기자가 1번 레인부터 순차적으로 각 선수를 촬영하며 소개한다. 그때마다 긴장한 얼굴들이 잠깐씩 풀어지며 수줍으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나온다. 영락없는 중학생이다. 그중에서도 6번 레인에 선 12번 선수가 제일 눈에 띈다. 두 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그리며 웃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준비 시간을 모두 소진하기까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긴장을 푼다. 신호에 따라 스타팅 블록에 두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땅을 짚는다. 딱! 신호총 소리에 상체를 편 선수들이 일제히 결승선을 향해 쏟아진다.

초반에는 비슷하게 달려 나가는 것 같더니 50m 라인을 지나자마자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양팔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뒤꿈치가 허벅지에 닿을 듯 무릎이 빠르게 구부러지는 선수, 왕서윤이다. 매 초 격차가 벌어지더니 마침내 왕서윤이 결승선을 밟는다.

내달리던 속도를 바로 줄이지 못해 한참 트랙을 뛰던 왕서윤이 기록판을 확인한다. 11초83. 눈이 휘둥그레진 왕서윤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으나 웃음까지는 감추지 못한다. 마침내 트랙에 멈추어 선 그가 동료 선수를 껴안는다.

여자중등부 100m 결선에서 왕서윤이 11초83을 기록하며 부별 한국기록(종전 11초88)을 경신했다. 2009년 이후 17년 만에 갈아치운 기록으로, 이번 대회 여자 일반부(성인) 100m 1위에 오른 김주하 기록인 11초87보다 0.04초 앞섰다.

왕서윤은 서울체육중학교 2학년으로, 최근 두 차례 개인 종목에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무서운 성장세라는 평이 뒤따르는 이유다. 2위는 권제희(언남중, 12초22), 3위는 김아인(광주체중, 12초46)이 차지했다. 두 선수 기록 역시 만만찮다는 점에서 한국 단거리 육상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많아졌다.

왕서윤은 경기를 마치고 “날씨가 좋지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12초대 기록을 예상했는데, 11초대에 진입하며 부별 한국 기록을 경신하게 돼 매우 기쁘다”며 “가르쳐 주신 코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도 이 기록을 넘어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윤여춘 육상 해설위원은, 당일 “왕서윤 선수가 우리나라 시즌 고등학교, 대학교, 일반부 전부 다 (포함)해서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며 한국 육상계에 신예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이 기록은 어떻게 보면 굳어진 기록이다. 깰 수 없을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012년 11월생인 왕서윤은 만 나이로 13세5개월이다. 1m63㎝ 키로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다. 체육 교사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운동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여동생과 남동생 역시 증산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날씨 좋지 않고 컨디션 좋지 않은데…
성인 선수들 모두 제치고 최고 기록

왕서윤이 처음 육상 기록판에 이름을 들이민 때는 지난 2023년이다. 증산초 4학년 때 취미로 육상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중 1년 만에 100m 공식 대회에서 13초13 기록을 썼다. 추가로 1년이 더 지난 6학년 때는 12초82를 기록했다.

서울체중에 진학한 이후에는 단거리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지난해 4월에는 춘계전국초중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여자중학교 1학년부 100m 결승에서 12초33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11초94로 본인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했다. 육상계에서는 단거리 선수가 이토록 빠른 기간 안에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이례적’이라 평한다.

왕서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유연성이다. 보통 단거리 경기에서는 폭발적 스퍼트로 승패가 갈리는데, 그가 연출하는 경기 장면에서는 출발 이후 속도에 긴장감이 붙는다. 스퍼트에서 아낀 힘을 막판까지 끌어내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왕서윤은 힘으로 뛰지 않는다. 800m 선수처럼 리듬과 유연성을 앞세운다. 따라서 폭발적인 스퍼트 없이도 후반까지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말 그대로 상당히 부드럽다. 어깨에도 힘이 전혀 안 들어가고. 부드러운 유연성이 있어야만 기록이 자꾸 단축된다”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한국 단거리에서 이런 선수는 없었다. 미국 선수 앨리슨 펠릭스(2012 런던올림픽 200m 금메달리스트)를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왕서윤을 지도하는 이강민 코치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며 왕서윤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만들어낸 기록”이라고 칭찬했다. 덧붙여 “스타트 후 가속 구간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부드럽다”며 “천부적인 재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코치는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다. 한번 집중하면 몰두해서 꼭 이뤄낸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즐기면서 훈련을 한다. 미래가 기대된다”고도 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성장기인 점을 고려해 근력 운동을 제한하는 등 훈련량을 조절하고 있다. 현재 왕서윤은 주중 방과 후 3시간, 토요일 5~6시간 정도를 훈련 시간으로 쓰고 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훈련 중독형 선수는 아니’라고 한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훈련하는 자기 주도형 훈련을 운영한다고. 성격도 밝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후배 관계도 좋고 팀 적응력도 뛰어나다. 경기 때마다 동료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실감할 수 있다.

체육인의 피
신기록 행진

김건우 KBS 스포츠 해설위원은 “왕서윤의 재능은 10년에 한 명 정도 나올 수준”이라며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기록이 느는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했다. 윤 해설위원 역시 “잘 성장해 고등학생이 되면 한국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왕서윤을 응원했다.

이번 제55회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신기록 행진이 이어졌다. 한국 신기록 2개, 대회 신기록 3개가 쏟아졌다. 그중 하나는 왕서윤이 쓴 것이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는 나마디 조엘진(예천군청)이 10초19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여자 단거리 경기에서 왕서윤이 돋보였다면, 남자 단거리에서는 단연 조엘진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는 한국 육상 단거리 기대주로 꼽힌다.

조엘진은 이 대회 첫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 10초19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종전 대회 기록(10초22)보다 0.03초 앞당겼다. 지난해 실업 육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개인 최고 기록(종전 10초23)까지 경신했다.

참고로, 남자 100m 한국 기록은 김국영이 2017년 6월 코리아오픈 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세운 10초07이다.

다만 조엘진은 이어진 준결선에서 10초22를 기록해 결선 진출에 성공했으나, 불안정한 날씨로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결선 출전은 포기했다.

그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 14일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에서 열린 요시오카 그랑프리 남자 100m에서 개인 최고 기록(10초23)으로 1위에 올랐고, 이번 대회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 밖에도 남자 중등부 창던지기에서는 김정윤(울산 서생중)이 69m62로 한국 기록을 경신했다. 남자 고등부 원반던지기에서는 손창현(구미 금오고)이 53m89로 대회 신기록을 썼다.

여자부에서도 기록 깨기가 이어졌다. 여자 중등부 100m 허들에서 이하늬(부산 대청중)가 14초28로 27년 만에 대회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암울한 육상계
날아든 희소식

특히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상혁(용인시청) 등도 기대감을 모은다. 이들은 차세대 스타로까지 불리고 있다. 이 코치는 “한국 육상에서 남자, 여자 선수 모두 상승세를 탄 것 같다”며 “지도자들도 조금씩 변화했다”고 평했다.

또 “이전에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최근 몇 년 새 훈련에 대한 고민, 외국의 훈련법 등을 같이 나누며 공부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회상했다.

한때 100m 여자 한국 기록 보유자 이영숙은 기록 단축이 어려운 한국 육상계를 진단한 바 있다. 아시안게임 메달권 기록이 지난 30여년간 약 0.5초 전후로 단축됐음에도 한국 기록은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얇은 선수층이었다. 이영숙은 “선수층이 얇아 벽을 깨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수 선수를 향한 격려와 유망주 발굴이 더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한국 육상계는 이번 목포 대회에서 이 우려를 종식할 열쇠를 찾을 수 있을 테다.

대한육상연맹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코치는 “연맹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실 것”이라며 “유망주 선수들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국을 대표해 성장할 수 있는 선수로 만들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코치는 또 “어린 선수들이 일찌감치 국제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면서 “지난해 몇몇 선수들과 함께 해외로 나가서 훈련하고 돌아왔다. 선수에게는 물론, 지도자인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경험을 쌓아 국제 경쟁력을 더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재능 있는 신예 선수들이 등장했고,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이 이들을 잘 이끌며 한국 육상의 미래를 다시 쓰고 있다.

이제 왕서윤이 넘어야 할 산은 국내 기록 보유자 이영숙이다. 현재 안산시청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4년에 여자 100m 한국 기록 11초49를 수립했다. 왕서윤의 이번 기록과는 0.34초 차이. 단거리에서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지만, 왕서윤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코 비현실적인 간격도 아니다.

11초83서 0.34초 앞당기면 한국 기록
세계 신기록 10초49까지 1초34 남아

이영숙은 왕서윤과 비슷한 시기인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단거리 육상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 3관왕을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4년부터 10여년 뒤인 1994년까지 여자 100m 종목 한국 신기록을 일곱 차례나 갈아치웠다. 전국체전 여자 100m에서 11연패를 달성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 여자 100m에서 동메달(12초10)을 목에 걸었다. 그는 해당 종목 마지막 한국인 메달리스트다. 이후 4년 뒤에는 서른이 넘은 나이로 한국 기록(11초49)을 무려 2차례나 수립했다.

이영숙이 세운 1994년 제48회 전국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100m 결선 및 같은 해 열린 후쿠오카 국제슈퍼육상경기대회에서 세웠던 ‘11초49’ 한국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왕서윤은 지금보다 0.34초 이상 더 빨라져야 이 기록을 깰 수 있다.

왕서윤이 한창 성장 중인 중학생이라는 점, 성장세가 가파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영숙이 낸 기록도 따라잡으리란 기대감이 쏟아지고 있다. 왕서윤을 지켜봐 온 이 코치는 “지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경기 경험을 더 쌓으면 내년 정도면 성인 여자 100m 한국 기록에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기록을 다시 쓰고 나면, 왕서윤은 이어서 세계 신기록에 도전할 수 있다. 100m 여자 세계 신기록인 10초49는 미국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가 썼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선발전에서 나온 기록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선수도 닿지 못했다.

당시 풍속 계측 오류 논란 등이 있었기에 이 기록을 깨기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때 함께 세운 200m 기록 21초34 역시 같은 이유로 요지부동이다. 자메이카 선수 셸리 앤 프레이저 프라이스, 일레인 톰슨 헤라 등이 초를 줄였지만, 0.1초 차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육상 전문가들은 조이너가 세운 기록을 “다른 시대의 기록”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신기록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곧 다가올 일이라는 뜻일 수도 있을까. 냉정한 트랙 위 승부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가장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기록은 여자 800m로, 43년째 붙박이다.

체코 선수 야르밀라 크라토츠빌로바가 1983년에 800m 1분53초28, 난공불락이라 할 만한 기록을 써냈다. 2024년 파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킬리 호지킨슨(영국)이 24년 만에 실내기록을 깨고, 실외기록도 1분54초61까지 따라잡았지만, 아직도 한참 남았다.

세계 향해
전력 질주

왕서윤은 과연 ‘붙박이’ ‘요지부동’ ‘독보적’ ‘다른 시대의 기록’ ‘난공불락’ 등으로 수식할 법한 단거리 육상 기록을 깨나갈 수 있을까. 이번 목표 대회를 기준으로 왕서윤과 함께 트랙 위를 달리며 초를 줄여나갈 어린 선수들에게도 기대가 실리고 있다.

기량 좋은 선수는 준비됐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볼트 같은 선수가 나오기까지, 역량 있는 선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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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후폭풍’ 표심 가른 당락 결정타

‘6·3 후폭풍’ 표심 가른 당락 결정타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지방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나왔으니 원인을 분석할 시간이다. 여야 모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받은 상황이라 외부보다는 내부가 더 시끌벅적한 모양새다. 여당을 견제하면서 야당을 심판한 민심의 절묘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됐을까. 지방선거를 뒤흔든 두 이슈, 주식과 부동산의 관점으로 바라봤다. 광역단체장 12 대 4. 지방선거의 승패를 가르는 시‧도지사 결과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5대 12(당시 17개 시‧도)로 완패했던 4년 전 지방선거 결과를 완벽하게 뒤집었다. 문제는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이번 지방선거를 민주당의 완승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모든 선거에서 가장 핵심 지역인 서울을 빼앗겼다. 이긴 것도 진 것도 이번 지방선거는 여러모로 민주당에 유리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우선 12‧3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을 거쳐 당선된 대통령이 취임 1년 만에 맞는 선거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지율은 1년여 동안 60%대를 상회했다. 말 그대로 민주당이 ‘질 수 없는’ 선거였다. 실제 선거 초기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민주당의 ‘싹쓸이’를 예견했다. 국민의힘의 텃밭인 TK(대구‧경북) 지역에서조차 민주당이 이기는 결과가 나왔다. 15 대 1, 16 대 0 등의 결과를 예상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선거에서는 달랐다. 민주당이 12곳에서 승리해 표면상으로는 국민의힘을 압도했지만 실속은 챙기지 못했다. 보수 궤멸 얘기까지 나왔던 국민의힘은 텃밭을 지키고 서울도 수성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도 119 대 95(무소속 13)로 선방했다. 구체적으로 뜯어보면 국민의힘이 마냥 졌다고 보기 어려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민주당으로서는 서울에서의 패배가 뼈아팠다. 국민의힘 후보로 나온 오세훈 서울시장과 민주당 정원오 후보의 득표율 차이는 불과 1.15%p, 표 차로 따지면 6만여표였다. 서울 성동구청장 출신의 정 후보는 이 대통령의 ‘샤라웃’을 받은 이른바 ‘명픽’으로 불렸다. 이 대통령이 ‘일을 잘한다’는 내용으로 정 후보를 언급하면서 인지도와 지지도가 수직 상승했다. 정 후보는 박주민 의원, 전현희 의원 등 민주당 내에서 잔뼈가 굵은 의원을 상대로 한 경선에서 이겼다. 여론조사 결과도 국민의힘 오 시장과 크게 벌어졌다. 20%p 차이가 나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서울시장 당선은 ‘떼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광역단체장 12곳 이기고도 서울 내주면서 ‘반쪽 승리’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 것은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였다. 오 시장과의 격차가 줄기 시작했고 선거가 임박해서는 오차범위 이내의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사전투표를 거쳐 본투표 당일 오후 6시 출구조사가 발표됐다. 방송 3사는 정 후보 51.4%, 오 시장 46%로 민주당이 무난하게 서울을 탈환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오 시장의 신승이었다. 서울 송파구 등에서 투표용지 부족으로 ‘부실 선거’ 논란까지 벌어진 끝에 나온 결과였다. 서울에서의 패배로 민주당은 광역단체장 12곳에서 이기고도 웃지 못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사실상 패배’라는 아쉬운 탄식이 나왔다. 심지어 이 대통령조차 ‘민심의 경고’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서울시장 선거 결과를 두고 부동산이 표심을 갈랐다고 설명했다. 이재명정부의 부동산 정책에 분노한 민심이 오 시장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부동산 문제를 시장에 맡기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하지만 취임 이후 부동산과 관련해 강경 발언을 이어가는 등 정부가 시장에 깊숙이 관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달 9일에 종료된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정책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다주택자가 누리고 있던 사실상의 세금 감면 혜택을 거둬들이겠다는 취지였다. 이 대통령은 X(옛 트위터)에 연일 다주택자를 압박하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시장을 이기는 정부는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는 내용의 글도 썼다. 정책으로 부동산 가격을 잡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재명정부는 부동산에 묶여 있는 돈을 주식시장으로 흘러가게 하는 이른바 ‘머니 무브’를 꾀하는 정책을 쓰고 있다. 그 결과 주식시장은 ‘코스피 5000’ 시대를 넘어 1만 시대를 바라볼 정도로 폭등했다. 어떤 악재가 발생해도 하루이틀이면 장을 말아 올리는 역대급 ‘불장’에 개미들은 빚을 내서까지 진입했다. 6만 표로 당락 갈려 반면 부동산 시장은 크게 휘청였다. 수요를 억제하고 공급을 늘리면 가격은 자연스럽게 내려간다. 경제의 가장 기본으로 알려진 수요-공급의 원리다. 이정부의 정책도 그 방향으로 설계돼있다. 다주택자를 옥죈 것도 시장에 매물을 공급하려는 의도였고 서울 전역과 경기 일부를 토지거래허가 구역으로 지정한 것은 수요를 억제하려는 노력이었다. 부동산 시장은 정부의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매물은 예상만큼 나오지 않았고 수요는 많아졌다. 앞으로도 집값이 오를 것이라는 심리가 시장에 반영되면서 너도나도 빨리 집을 사려고 달려든 것이다. 매물이 줄어드는데 집을 사려는 사람은 많으니 집값은 올랐다. 매매 시장의 움직임은 전‧월세 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집을 가진 사람들이 전세 대신 월세로 바꾸기 시작했고 세입자는 ‘날벼락’을 맞았다. 동시에 월세가 폭등했다. 집을 사기엔 호가가 너무 높았고 세입자로 살기에도 팍팍해졌다. 서울에서 집을 사려던 사람들이 외곽으로 밀려나는 구조였다. 20~30대의 상황은 더 암울했다. 근로소득은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부동산 투기 수요를 막겠다며 대출은 막아둔 상태였고, 대출이 된다 해도 서울에 집을 사기엔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시세가 높아졌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로,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만진 이들은 20~30대가 아니었다. 주식 폭등도 영향 적었다 한 주식 투자자는 “지금과 같은 불장에서는 모두가 돈을 버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나도 돈을 벌 것으로 생각해 시장에 뛰어든다. 하지만 실제 인생을 바꿀 정도로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다. 그리고 그렇게 돈을 번 사람들은 대부분 상급지로 이사 간다. 이미 상대적으로 상급지에 사는 사람이 최상급지로 가는 거다. 이게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이 같은 상황은 서울시장 선거 결과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오 시장이 정 후보보다 표를 많이 받은 자치구는 25개 중 10곳이다. 정 후보는 15곳에서 이기고도 승리하지 못한 셈이다. 오 시장이 이긴 자치구에는 공통점이 있다. 집값이 크게 상승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오 시장은 송파‧광진‧영등포‧양천‧강동‧동작‧중‧용산‧서초‧강남구에서 정 후보에 앞섰다. 이 중 서초와 강남을 제외한 8개 지역구는 이정부 출범 이후 아파트값 상승률이 가장 많이 올랐다.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른 10개 지역구 중 성동‧마포구만 빼고 오 시장이 이긴 지역이 일치하는 것이다. 성동구는 정 후보가 3선 구청장을 지낸 곳이다. 서울시장 선거만큼은 ‘부동산 표심’이 당락을 갈랐다고 봐도 될 정도의 결과다. 전문가들은 자산 투표 경향이 결과에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자산투표는 유권자가 자신이 보유한 집이나 주식 등과 관련한 경제적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현상을 뜻한다. 부동산 비중이 큰 강남권이 선거에서 상대적으로 보수 후보를 많이 지지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하지만 이정부가 출범 이후 내놓은 대출 규제, 토지거래 허가구역 지정, 다주택자 압박, 보유세 개편 시사 등의 정책은 강남권뿐만 아니라 서울 전역을 들썩이게 했다. 부동산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역구가 과거와 비교해 늘어났다는 뜻이다. 이들의 표심이 오 시장에게 집중되면서 정 후보는 석패했다. 집값에 반응한 선택 많았다 이, 취임 1주년서 “정상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이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지난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부동산 관련 세금 제도를 정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투기 목적의 부동산 보유 부담을 늘리겠다는 뜻을 재확인한 자리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 보유세가 대체로 낮다. 많이 사 모아도 부담이 별로 없다”며 “투기용으로 가진 것을 내놓으면 엄청난 공급 여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전세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종의 사금융인데 지금 사라져가는 추세”라며 “정상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집값) 상승 압력을 나름 잘 막아왔다”며 “선거에는 나쁜 영향보다 좋은 영향이 차라리 더 많지 않았을까 싶다. 1월부터 구두 개입을 통해서 눌러 놓지 않았으면 엄청나게 폭등했을 것”이라고 부동산 정책에 대해 자평했다. 공급 대책에 대해서는 “임대를 싸게, 좋은 곳에, 평범한 중산층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좋은 품질의 것으로 공급하려 한다”고 언급했다. 오 시장은 이 대통령의 부동산 정책 관련 발언을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께서 오늘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최근 전세 매물의 급격한 감소와 전‧월세 가격 상승에 대해 ‘정상화 과정’이라고 답변했다”며 “현장의 고통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괴리된 시각”이라고 꼬집었다. 정책 그대로 오 “참사다” 그러면서 “지금 전세가 소멸하고 있는 현상은 어떤 시대적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라며 “정부의 잘못된 부동산 정책이 초래한 뼈아픈 결과이자 서민 주고 안정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정책 참사’의 장면”이라고 지적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