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대 국회가 문을 연 가운데, 과연 21대 국회는 얼마나 생산적인 국회였을까 의구심이 드는 요즘이다. 여느 국회와 다를 바 없이 21대도 ‘비생산적 국회’로 역사에 오명을 남길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국회 본연의 기능인 입법 기능의 측면서만 평가해 보자면, 역대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법안 가결률 10% ↓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는 2만4506건의 법안을 발의해 그중 2357건의 법안을 원안 및 수정 가결함으로써 9.6%의 가결률을 기록했다. 10개 법안 중 1개의 법안도 통과시키지 못했으니 말 그대로 생산성 제로에 가까운 식물국회와 다를 바 없다.
20년 전인 16대 국회와 비교해 보면 법안의 발의 건수는 10배 이상 늘어났지만, 가결률은 37.7%서 9.6%로 대폭 줄었다. 액면상 생산량은 4배 가까이 줄어든 셈이다. 왜 법안 발의 건수는 폭증했지만, 가결률은 극단적으로 줄어들었을까?
발의 건수의 폭증은 법안 발의의 중심이 정부서 개별 의원으로 옮겨간 데서, 가결률의 감소는 여야 간 정쟁의 격화로부터 각각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까다로운 법안 심사 절차를 거쳐야 하는 정부 발의 법안보다 별도 규제 심사를 받지 않는 의원 발의 법안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면서 16대 국회서 74%였던 의원 발의 비중은 21대 국회 들어 97%로 대폭 확대됐다.
하지만 여야 및 선수(選數) 가릴 것 없이 입법 경쟁에 내몰린 의원들이 앞다퉈 법안 발의에 목을 맨 결과는 입법의 증가에 따른 부실화로 나타났다.
문재인정부서 윤석열정부로 이어지는 진보→보수의 정권교체 과정서 나타난 여야간 극단적인 진영 대립으로 인해 여야 합의를 통해 본회의에 상정되는 법안 수가 눈에 띄게 줄면서 21대 국회도 결국 무능과 비효율의 대명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태원 참사, 신림동 반지하 일가족 참변, 전세 사기 피해 등 사회적으로 굵직한 사건이 언론에 대서특필될 때마다 의원들은 경쟁적으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국회선진화법 효과에 반신반의
그러나 정작 해당 법안들은 여야 간 정쟁에 막혀 상임위나 본회의에 계류되면서 임기 만료로 인해 자동 폐기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한때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48건의 안전 대책 법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중 본회의를 통과한 건, 정부의 이동통신사 데이터 요청 권한 및 재난지역 국고보조 지원 대상에 소상공인을 포함하는 법안이 유일했다. 이것만 봐도 우리 국회의 입법 교착이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다.
물론 이태원 참사 발생 1년6개월 만에 뒤늦게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그나마 식물국회의 마지막 선물로 위안과 희망을 안겨주긴 했지만, 입법 교착의 현실을 넘어서진 못했다.
도대체 이처럼 꼬일 대로 꼬여버린 입법 교착의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 것인가? 그간 국회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나름의 노력을 다해왔다. 이른바 ‘몸싸움방지법’으로 불리는 국회선진화법이 그 대표적 사례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대폭 제한하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 법안은 재적 의원 5분의 3(180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본회의에 올리도록 했다. 하지만 국회선진화법의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경향이 강하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 그 해답을 국회법 제114조의 2에 명문화돼있는 교차투표(crossvoting, 일명 자유투표 free vote)의 활성화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 듯하다. 정당이 주도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고 국회의원은 정당이 당론으로 정한 방침에 따라 투표하는 정당투표(party vote)와 달리 교차투표는 의원의 개인적 의견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하는 방식이다.
정당 방침과 무관하게 의원 개인의 판단에 따라 투표하는 것인데 국회에 넘겨진 법안들 중 주로 윤리적·양심적 사안에 대해서는 교차투표가 이뤄지는 경향이 강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46조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국회법 제114조의 2는 ‘의원은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에 따라 투표한다’고 규정해 국회서 의원의 교차투표를 허용하고 있다.
과거 국회에선 정당 기율이 지나치게 강조돼 개별 의원의 자율성이 제한되는 문제가 있었고, 정당 정책에 반대되는 의견을 표명하기 어려워 다양한 국민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입법 과정서 의원들의 자유의사 표현과 국민 대표성 제고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돼 2002년 3월7일, 이만섭 국회의장 주도하에 국회법 일부 개정을 통해 교차투표 조항을 신설함으로써 국회의원들이 일정 요건 아래서 소속 정당의 의견과 다르게 투표할 수 있게 됐다.
정당 일변도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선하고 의원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취지서 국회법 제114조의 2를 통해 교차투표 제도를 도입한 것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합리적 결정이었다.
의원 자율성·대표성 제고 가능한 제도
국회법 제114조의 2에 명시된 교차투표 제도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의원의 자율성과 대표성을 제고할 수 있는 제도라는 점이다. 교차투표를 통해 의원 개인의 신념과 양심에 따른 의사 표현이 가능해지는데, 이는 의원이 국민의 대표자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한다.
둘째, 다양한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장점도 존재한다. 교차투표는 정당의 획일적인 정책 외에 다양한 국민 의견을 의회에 반영할 수 있다. 소수 의견을 대변할 기회가 늘어나면서 의회 의사결정의 대표성도 제고할 수 있다.
셋째, 정당 간 협력과 타협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차투표를 통해 특정 정당의 일방적 독주를 방지하고 정당 간 협상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타협과 균형이 이뤄져 합리적인 정책 결정이 가능해진다.
넷째,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거대 정당의 독단적 정책 결정을 방지할 수도 있다. 교차투표는 특정 정당의 일방적인 정책 강요를 막고 더 균형 잡힌 의사결정을 유도한다. 이를 통해 독단적이고 편향된 정책 결정을 방지할 수 있다.
다섯째,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교차투표는 의원들의 자율성을 보장함으로써 국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높일 수 있다.
물론 교차투표가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며, 다음과 같은 단점들도 존재한다.
첫째, 정당 정책의 왜곡이나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교차투표를 통해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입장과 다르게 투표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정당의 정책 기조와 공약이 의결 과정서 훼손될 수 있다. 유권자들이 선택한 정당 정책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정당의 책임성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 교차투표로 인해 정당의 정책 추진력과 실행력이 저하될 수 있다. 국민이 선거서 선택한 정당의 공약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 정당의 책임성이 크게 훼손될 가능성도 있다.
셋째, 의회 의사결정의 비효율성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교차투표로 인해 정당 간 협력과 타협이 어려워질 수 있고 법안 및 정책 결정 과정서 혼란과 갈등이 증폭돼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넷째, 극단적 정당 대립을 심화할 가능성도 있다. 교차투표는 정당 간 극렬한 대결구도를 일으킬 수 있으며, 소속 정당의 정책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도 거세질 수 있다.
교차투표 한계 넘으려는 노력 필요
교차투표는 양날의 검과 같다.
21대 국회가 경험한 입법 교착의 꼬인 실타래를 22대 국회서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국회 선진화법의 실효성 극대화 외에 교차투표제도를 현실화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미국 의회의 경험을 통해 확인한 대로 의원들이 보여주는 정당으로부터의 높은 자율성이야말로 입법 교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훌륭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우리 정치의 복잡한 현실에선 교차투표가 지닌 여러 제도적 문제점으로 인해 입법 교착의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오히려 정당과 국회에 대한 국민적 불신만 가중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상황을 연출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국회의원의 교차투표를 통해 기대하는 것은, 입법 교착 상태서 정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의 유불리를 떠나 개인의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것이다.
이는 국민 여론에 더 귀 기울여 멋진 정치를 보여달라는 것이지, 결코 국회의원 개인의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기회주의적 투표로 정당정치의 근간마저 허물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입법 교착이 더 심화할 가능성이 커 보이는 22대 국회가 생산적인 국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교차투표가 지닌 문제점과 한계를 넘어서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물론, 정당 정책의 일관성과 책임성, 의회 의사결정 효율성 제고를 위한 관련 규정의 정비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
김명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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