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본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술로, 서로 다른 입장을 설득하고 균형을 맞추는 과정이 본질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는 조정이 아니라 충돌을 설계하는 구조로 작동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는 서로를 설득하지 않고 제거의 대상으로 규정한다. 그 결과 논쟁은 해법으로 수렴되지 못한 채 감정의 확산으로 소모되고, 정치의 기능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평소 국민은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 그리고 중도라는 다층 구조 속에서 각자의 판단을 유지한다. 그러나 선거가 시작되는 순간 이 구조는 급격히 붕괴된다. 약 30%의 중도는 양 진영으로 흡수되고 정치 지형은 45 대 45의 대결 구도로 재편된다. 이는 중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받은 결과다.
45 대 45
정치 지형
실제 여론에서도 중도층은 꾸준히 존재한다. 하지만 선거 국면만 되면 사실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 반복 구조가 정치의 수준을 점점 왜곡시키고 있다.
국민은 원래 둘이 아니라 셋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성향은 본질적으로 다층 구조다. 상당수 국민은 특정 진영에 고정되지 않는다. 이슈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중도적 위치에 존재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거라는 이벤트를 통해 단순한 이분법 구조로 재편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판단은 축소되고 선택의 폭은 의도적으로 좁아진다.
선거 국면에서는 정당의 전략도 더욱 선명해진다. 중도를 설득하기보다 끌어당겨 편입시키는 방식이 선택된다. 그 결과 중도는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이동의 객체로 전락한다. 판단은 사라지고 진영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결국 유권자의 선택은 자유로운 판단이 아니라 구조적 압력의 결과가 된다.
문제는 이 구조가 선거 이후에도 유지된다는 점이다. 중도는 다시 정치에서 배제되고 정당은 지지층 중심으로 재편된다. 정책 경쟁은 사라지고 진영 경쟁만 남는다. 정치의 목적보다 진영의 생존이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정치 시스템은 점점 단순화되고 극단화된다.
방송은 갈등을 소비하는 산업이 됐다= 정치 토론 프로그램은 원래 다양한 시각을 검증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방송 구조는 다르다. 진보와 보수의 충돌을 중심으로 설계된다. 중도 패널은 처음부터 배제된다. 균형은 사라지고 갈등만 남는다. 토론은 해법이 아니라 대립을 재생산하는 형식으로 고착된다.
필자는 모 방송국으로부터 패널 출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이력과 칼럼 10여점을 보냈지만, 돌아온 답은 “중도 색깔은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이것이 지금 방송 구조의 현실이다. 그러나 방송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시청자는 극진보와 극보수는 물론이고, 자기 진영 주장만 반복하는 패널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시청자가 원하는 것은 진영 대변인이 아니다.
언제나 중도층 꾸준히 존재
선거 국면선 사실상 지워져
이 구조는 방송 산업의 수익 구조와 직접 연결돼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긴장과 충돌이 필요하다. 그래서 패널 구성도 갈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결국 시청자는 해법이 아니라 장면을 소비하게 되고, 문제의 본질보다 충돌만 보게 된다.
사회자조차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는 순간, 방송은 현실을 반영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 분열을 확대하는 장치로 변하게 된다.
중도는 ‘중간’ 아닌 ‘조정자’= 중도는 애매한 위치가 아니다. 특정 이해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위치다. 이 지점에서 정치적 균형이 가능해진다. 진보와 보수의 논리를 동시에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도는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니라 ‘조정자’다.
중도는 어느 한쪽의 이익을 직접 대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감정이 아니라 논리로 문제를 바라보며 양 진영을 동시에 지적할 수 있다. 또 갈등을 재구성하고 과잉된 주장들을 걸러낼 수도 있다. 이 기능이 사라지는 순간 정치적 충돌은 끝없이 증폭된다.
중도 패널이 토론장에 등장하는 순간 구조는 달라진다. 토론은 승부가 아니라 과정이 되고, 논쟁은 합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잃어버린 것도 바로 이 조정 기능이다. 양 진영은 각자의 주장만 반복할 뿐, 이를 조율할 주체가 사라졌다. 그 결과 사회 전체의 갈등 비용은 계속 커지고 있다.
유튜브는 분열 강화하는 구조= 유튜브 정치 콘텐츠는 선택 기반 구조다. 이용자는 보고 싶은 것만 선택한다. 그 결과 진영별로 완전히 분리된 정보 환경이 형성된다. 서로 다른 의견이 만날 기회는 사라지고, 현실 인식 자체가 따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진행자와 출연자까지 특정 진영에 치우치면서 중도는 들어갈 통로조차 잃고 있다.
진보와 보수
애매한 위치
알고리즘은 이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기존 성향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같은 의견을 계속 축적시킨다. 확증 편향은 강화되고, 진보는 더 진보적으로, 보수는 더 보수적으로 고착된다. 이 구조에서는 다른 의견보다 같은 의견이 더 가치 있는 콘텐츠가 된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접점은 점점 사라진다.
결국 설득은 작동하지 않는다. 대화는 단절되고 남는 것은 감정적 동조뿐이다. 사회는 분열되고 중도는 개입할 공간 자체를 잃는다. 공론장은 사라지고 각자의 세계만 강화된다. 극단적 진보와 극단적 보수가 유튜브의 핵심 이용층으로 남는 현상 역시, 플랫폼 구조가 가진 한계를 보여준다.
집회도 ‘치킨게임’ 구조로 변해= 대규모 집회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표현 방식이다. 시민이 직접 의견을 드러내고 권력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진보와 보수가 같은 공간에서 따로 모여 서로를 향해 메시지를 던진다.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가 대표적이다. 설득은 사라지고 압박만 남는다.
참가자들은 같은 주장만 반복해 외치고 같은 이야기만 듣게 되면서 다른 관점은 자연스럽게 차단된다. 상대 진영에 대한 이해는 사라지고 논쟁은 점점 공격적으로 변한다. 감정이 증폭될수록 이성은 밀려난다. 결국 집회는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갈등을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중도는 집회 현장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직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회에 나타나지 않는 중도가 가장 큰 집단일 수 있다. 문제는 그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촛불과 태극기가 치킨게임처럼 맞서는 상황에서도 이를 조정할 힘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 결과 균형은 작동하지 않고 충돌만 확대된다.
중도는 왜 사라지나? 갈등으로 돈 버는 구조 때문= 필자는 결국 정치와 방송, 플랫폼이 모두 ‘갈등을 통해 이익을 얻는 구조’로 연결돼있다고 본다. 갈등이 클수록 지지층은 더 강하게 결집하고 시청률과 조회수는 상승한다. 플랫폼은 체류 시간 증가를 통해 수익을 확대한다. 이 구조 속에서 갈등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유지되고 증폭되는 자원이 된다.
반면 중도는 전혀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갈등을 키워도 얻을 수 있는 이익 구조 자체가 없다. 조직과 동원력도 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수익 모델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소리는 작고 영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중도는 실제로 존재함에도 구조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공고해지는
비대칭 구조
이 비대칭 구조는 반복될수록 더욱 공고해진다. 갈등은 계속 누적되고 사회는 점점 균형을 잃어간다. 이를 조정해야 할 기능은 약화되고 이를 대신할 장치도 보이지 않는다. 남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충돌과 확대되는 긴장뿐이다. 그리고 그 비용은 결국 사회 전체가 감당하게 된다.
중도는 왜 정당이 되지 못하나= 중도를 제3당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많았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당이 되는 순간 권력 경쟁 구조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선거를 치르고 의석을 확보해야 하는 순간부터 전략은 달라진다. 지지층 결집과 선명성 강화 압박이 작동한다. 결국 중도의 본질인 균형과 조정은 사라지고 또 하나의 진영으로 편입된다.
문제는 중도가 정당으로도 실패하지만 독립적인 세력으로도 작동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진보와 보수는 조직과 네트워크를 통해 힘을 만든다. 그러나 중도는 개인으로만 존재한다. 그래서 힘이 분산되고 영향력으로 전환되지 못한다. 공통 의제도, 이를 묶어낼 플랫폼도 부족하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서 중도는 점점 더 약해진다. 판단은 있지만 행동은 없고, 의견은 있지만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큰 집단이 가장 약한 상태로 남는 모순이 굳어진다. 결국 해법은 분명하다. 중도는 정당이 아니라 ‘조직된 조정 세력’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직접 장악하기보다 균형을 설계하고 흐름을 조정하는 역할이다.
과거의 ‘어른’이 사라졌다= 과거에는 종교인, 지식인, 사회 원로 등 중재자들이 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진영 위에 서 있어 특정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위치를 유지했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판단이 가능했다. 양 진영이 다투다가도 중재자가 한마디 하면 흐름이 정리되곤 했다.
사회는 그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았다. 완전한 동의가 아니더라도 멈출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최소한 갈등이 더 확산되지 않게 만드는 역할은 가능했다. 그래서 극단적 충돌은 일정 수준에서 조정될 수 있었다. 사회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느 한쪽 이익 직접 대변하지 않아
싸움 정치서 해법 정치로 전환해야
지금은 그런 존재가 사라졌다. 심판 없는 경기처럼 충돌을 멈출 장치가 없다. 그래서 갈등은 계속 확대되고 사회 전체의 피로도만 높아지고 있다. 누구의 말도 멈춤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공통의 권위가 사라진 상태다. 초분열 사회에서 그 현상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중도 구조’ 만들어야= 이제는 중도의 역할을 제도화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향력만으로는 지속성을 만들 수 없다. 방송에서도 이 구조는 필요하다. 토론 구성 단계부터 균형을 설계해야 한다. 진보·보수 2:2 구조가 아니라 중도를 포함한 2:2:2 구조가 필요하다. 그래야 처음부터 다른 시각이 공존하는 판이 만들어진다.
유튜브, 집회에서는 물론, 공론장 전체에서도 필요하다. 특정 채널이나 특정 집단에만 맡겨둘 문제가 아니다. 플랫폼 구조 자체가 다양성을 반영해야 한다. 알고리즘 역시 균형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중도적 시각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노출되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중도가 참여할 구조가 만들어져야 균형이 생기고 정치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이것이 구조 변화가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 갈등이 충돌이 아니라 조정으로 전환된다.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 가능한 구조여야 한다. 그 과정이 쌓일 때 사회는 비로소 안정된다.
민주화의 출발점은 ‘중도 시민’이었다= 민주화의 출발점은 특정 진영이 아니라 시민 전체에 있었다. 그 중심에는 이념보다 상식을 기준으로 움직였던 중도 시민이 있었다. 이들은 어느 한쪽에 속하기보다 공동체 전체의 방향을 고민했다. 단순한 참여를 넘어 책임 있는 판단을 내리는 주체였다. 그래서 균형을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시민들은 특정 진영의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무엇이 옳은가를 기준으로 판단했고 상황에 따라 입장을 조정했다. 고정된 입장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선택을 이어갔다. 그래서 다양한 목소리가 하나의 흐름으로 모일 수 있었다. 중도는 침묵하는 집단이 아니라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에서는 그 중도 시민이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조직되지 못하고, 목소리로 연결되지 못한다. 서로를 확인하고 결집할 통로도 부족하다. 그 결과 공론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가장 큰 집단이 가장 약한 상태로 남는 역설이 반복된다.
이제 정치의 기준을 바꿔야= 6·3 지방선거 이후가 중요하다. 중도는 선거 이후에도 계속 반영돼야 한다. 선거 때만 소환됐다가 사라지는 방식으로는 의미가 없다. 정책 결정 과정에도 참여해야 하고 공론장에서도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의 방향도 흔들리지 않는다.
특정 진영
갇힌 논린
정당도, 방송도 바뀌어야 한다.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지지층 중심으로만 설계된 구조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다양한 의견을 반영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중도의 참여가 구조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그래야 특정 진영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정치가 가능해진다.
정치는 원래 싸움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충돌이 아니라 질서로 바꾸는 기술이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진보도, 더 강한 보수도 아니다. 그 둘 사이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이다. 중도가 살아야 민주주의도 다시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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